(손성태 정치부 기자, 국회반장) 최근 한 중진의원과의 가벼운 술자리에서 ‘문재인과 안철수’를 화제로 삼은 적이 있다. 자연스럽게 유력 대권 라이벌 주자로 인물경쟁력을 따져봤다.
그 중진의원은 “앞으로 시간이 많이 남아 현재 판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세월호와 두 번의 선거(6.4지방선거와 7.30재보궐선거)를 치르면서 야권내 권력지형에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동행 선거유세를 나가 보면 우선 ‘아우라(aura)’에서 차이가 났다고 주관적 평가를 내렸다. ‘사람을 불러모으는 능력'에선 별 차이가 없지만, 지지자들의 반응(태도)은 문재인에게 “더 뜨겁더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문재인의 대선후보 프리미엄이 남아서가 아니라 ‘안철수 바람'이 주춤해진 탓으로 분석했다.
객관적 통계에서도 문재인 의원은 안철수 의원을 앞서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8월 둘째주 발표한 야권 차기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문 의원은 차기 불출마를 선언한 박원순(19.8%) 서울시장만 경쟁권에 두고 있을 뿐 독주체제를 굳혀가고 있는 모양새다. 반면 보궐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난 안 의원(10.8%)은 지지율 두자릿수 유지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최근 문 의원의 행보가 과감해지고 있는 것은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체제의 해체와 함께 이 같은 여론지지율 변화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 의원은 지금까지 트윗 글을 통한 소극적 ‘논평정치’를 펴다 지난 19일 단식을 결행, 여야 정쟁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날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단식 중단을 권유하러 갔다가 실패하자 자신도 단식에 동참키로 한 것이다. ‘유민아빠’가 단식 37일째를 맞은 이날은 그가 ‘비토’를 놨던 세월호특별법 재협상을 놓고 여야 지도부가 막판 담판을 했던 미묘한 시기이기도 하다.
20일 한 대학생은 광화문광장에서 단식 중인 문 의원을 향해 “단식하지 말고 투쟁하라"는 피켓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거물정치인의 단식은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투쟁수단이다. 생명을 담보로 한 단식 자체가 극단적인 투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다 지지자들의 투쟁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부수적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다만, 여론이 수긍할 만한 ‘절박함’과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진정성을 의심받게 되고, 출구(중단)를 찾을 수 없어 체면만 구길 수도 있다.
문 의원의 단식은 ‘절박함'보다는 ‘명분'과 함께 ‘타이밍'이 절묘하다는 해석이 나온다. “목숨이 경각에 놓인 37일간의 ‘유민아빠’ 단식을 대신하고 싶다"는 그의 진정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효과’ 등과 맞물려 비(非)지지자들의 거부감이 희석됐기 때문이다. (설혹 거부감이 있더라도 문 의원의 단식 동참을 대놓고 비난할 상황은 아니다)
교황은 방한 중 세월호 추모 리본을 끝까지 떼지 않았고, 단식 중인 ‘유민아빠’를 비롯해 세월호 유가족을 여러 번 접견하는 등의 행보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을 세인의 관심사로 다시 돌려놓은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문 의원의 단식이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 모른다. 문 의원 측근조차 급작스런 단식 결행을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단식은 박근혜 대통령이나 새누리당에게 적잖은 압박 요인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야당 한 중진의원은 “‘유민아빠'를 살리겠다고 지난 대선주자가 단식에 나섰는데, 대통령이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문 의원도 이틀째 단식을 이어가면서 “박 대통령이 ‘유민아빠'를 만나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고통이 요구된다면 그 고통을 우리가 짊어져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 단식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지난해 11월말 ‘1219 끝이 시작이다’란 대선회고록을 출간하면서 여의도 정치에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 현안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원칙적 답변'만 내놓을 뿐 특별한 정견을 밝히지 않고 신중한 입장을 유지했다.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은 민주당과 안철수신당의 합당과 함께 세월호 참사가 터진 이후부터다.
그는 안철수계가 민주당 햇볕정책을 부정할 기미를 보이자 “6ㆍ15 공동선언과 10ㆍ4 정상선언의 승계 문제는 과거의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앞으로 남북관계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려면 남북이 함께 존중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방향”이라고 일침을 놨었다. 지난 5월 20일에는 예봉을 대통령에게 돌렸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통령 담화 발표 직후 “국정철학과 국정기조의 근본을 바꿔야 한다"고 공격한 것이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문 의원이 세월호 정국에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시의적절한 ‘한마디 정치'를 하고 있다"며 “그의 한 마디가 ‘임팩트’가 있어 야권내 영향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여야 원내대표가 내놓은 세월호특별법 합의를 무효화시킨 것도 그의 ‘한 마디’가 도화선이 됐다는데 이견이 없다. 그는 합의 직후인 8일 트위터를 통해 “특별법을 마련하게 된 힘도 사실 유족들 덕분입니다. 그분들이 동의하지 못한다면 여야가 다시 머리를 맞대는 게 도리입니다”라며 “정치가 그분들에게 더 상처를 드리면 안 되겠습니다”라고 재협상을 촉구했다.
야당 재건의 전권을 맡은 박영선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의 첫 작품에 ‘비토’를 놓은 것이다. 이후 새정치연합 내 강경파들의 ‘재협상’ 요구가 봇물을 이뤘고, 박 위원장은 의원총회에서 백기를 들었다.
자의든 타의든 존재감을 키운 문 의원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기존처럼 ‘한 마디 정치'를 통해 소극행보를 이어갈지, 아니면 내년 2~3월께로 예정된 전당대회에 출마할 것인지를 놓고도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이에 대해 문 의원의 측근은 “전당대회 관련해서는 아직 정리된 입장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차기 대권주자임을 감안할 때 문 의원의 전당대회 출마 가능성은 낮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 중진 의원은 “당권주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1년6개월 이상 남은 차기 총선의 공천권"이라며 “1년을 채우기 힘든 야당 대표의 수명을 감안할 때, 현재로선 전당대회 출마해서 챙길 실익이 없다"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은 지난 3월 통합신당을 출범시킨 후 두 번의 선거를 치르고 당 지도부가 책임을 지고 해체되기까지 채 5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부침이 심한 제1야당의 운명처럼 대권주자로서 문 의원의 행보도 이제는 예측 불가능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단식’이란 극단적 정치행보를 택한 것이 구체적인 예다. 문 의원이 전면에 나서면 야권내 대권후보인 잠룡(潛龍)들의 경쟁도 물밑에서 수면위로 떠오를 수 밖에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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