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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 더왕 푸야오그룹 회장, 문화대혁명으로 집안 몰락…정직함·승부사 기질…'불패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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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위 자동차유리회사 일군 차오 더왕 푸야오그룹 회장

BMW 등 名車에 유리 공급

하루 16시간씩 20년간 고된 일
10대때 과일·야채 팔면서 독학
수도계량기용 유리공장 인수로 기반
1985년 車유리 생산 집중…성공 가도

민간기업 첫 中증시 상장
佛회사와 합작…세계무대 등장
中서 생산 차 10대중 7대에 유리 공급

승부사 기질 갖춘 자선왕
2011~2012년에만 13억달러 기부
반덤핑 분쟁에 끝까지 대응
美·캐나다 상대로 승소 이끌어



[ 김보라 기자 ]
아버지는 재벌이었다. 1940년대 중국 상하이의 명물이던 융안백화점을 갖고 있었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는 남부러울 게 없었다. 아홉 살이 되던 해,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면서 아버지는 고향인 푸젠성 푸칭으로 낙향을 결심한다. 가족은 다같이 유조선에 몸을 실었고, 전 재산은 또 다른 배에 실렸다. 푸칭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은 뒤바뀌어 있었다. 짐을 실은 배는 풍랑을 만나 좌초됐고, 이들의 전 재산은 영영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루아침에 부자에서 거지로 추락했다. 6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중국 최대이자 세계 2위인 자동차 유리회사를 이끄는 거물이 됐다.

차오 더왕 푸야오그룹 회장(68)의 이야기다. 차오 회장이 1987년 세운 푸야오그룹의 유리는 현재 도요타, BMW, 벤틀리 등 세계적인 명차에 쓰이고 있다. 그가 거느린 직원만 전 세계 1만명. ‘자동차용 유리’라는 한우물을 파 중국 100대 부자에 이름을 올린 차오 회장은 미국, 일본, 유럽 시장에서 ‘불패신화’를 쓰고 있다.

○하룻밤에 부자에서 거지로

거친 파도에 모든 것을 빼앗긴 그의 가족은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했다. 다같이 농사에 뛰어들었다. 그의 부모님은 “못 먹어도 배워야 한다”며 아이들을 학당에 보냈다. 차오 회장은 “아홉 살에야 비로소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열 네 살이 되던 해 (학비가 없어) 그만둬야 했다”고 회고했다. 열다섯 살 이후로는 큰형이 보던 낡은 교과서와 사전으로 혼자 독학을 했다. 폭염 속에 하루 300근이 넘는 야채와 과일을 내다 팔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몸져 누웠고, 차오 회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의 첫 사업은 담배 유통이었다. 그는 “하루 2~3위안을 벌었고, 몇 번이나 민간기업 단속에 걸려 경찰서를 드나들었지만 그게 유일한 돈벌이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그때 꿈이라면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혼란스럽던 문화혁명이 끝난 1983년, 그는 운 좋게 한 수도계량기용 유리 제조공장에 도급을 맡았다. 설립 7년차였던 공장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고, 그는 과일과 담배를 팔아 모은 돈으로 공장을 인수했다. 지방정부 소유의 공장이라 아무도 살 엄두를 내지 않았지만 그는 달랐다. 혁명 직후라는 기회를 틈타 과감히 도전했다. 차오 회장이 인수한 그해, 공장은 적자를 벗어나 20만위안의 수익을 냈다.

○中 민영기업 최초 상하이 증시 상장

1985년 차오 회장은 중국이 자동차용 유리를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가격은 턱없이 비쌌다. 수도계량기 유리 생산을 중단하고 과감히 자동차용 유리 생산에 집중했다. 50위안에 만든 유리 패널을 1500위안에 팔았다. 1987년 11명의 투자자를 모아 627억위안을 투자해 푸아오유리유한공사를 세웠다. 가격 경쟁력을 내세워 수출도 했다. 10여개 제품에 불과했던 생산 라인은 현재 1만여개로 늘었다.

푸아오유리그룹은 1993년 중국 민영기업 최초로 상하이 증시에 상장했다. 주당 1.3위안에 거래를 시작해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19.19위안까지 올랐고, 현재 8위안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 푸야오그룹의 매출은 114억달러였다.

차오 회장은 협력의 달인으로 통한다. 푸야오그룹은 1996년 프랑스 유리회사 생고뱅과 합작해 유리 기업을 세웠고, 이를 발판으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이 기간 혼다와 폭스바겐 등을 고객사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현재 중국에서 생산하는 차 10대 중 7대는 푸야오그룹의 유리를 쓴다. 미국 시장 점유율도 30%를 넘는다. 최근 러시아 시장에도 진출했다.

○‘자선왕’과 ‘청렴왕’ 2관왕

차오 회장은 중국에서 ‘자선왕’으로 통한다. 불교 신자인 그에게 기부는 곧 생활이다. 차오 회장의 재산은 지난해 기준 11억4000만달러(약 1조1500억원). 그가 2011년과 2012년에 자신이 만든 자선단체 헤렌재단을 통해 기부한 돈은 13억달러에 달한다.

그는 “기부할 때마다 내가 더 작게 느껴진다”며 “어린 시절 배우고 싶어도 못 배웠던 때를 생각하며 교육에 모든 걸 바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위수 지진지역, 가뭄지역, 푸저우 도서관, 샤먼대학 등 도움이 필요한 여러 곳에 기부했다. 2010년에는 푸야오의 주식 10억위안을 기탁해 중국 최대 자선기금을 조성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가난했던 어린 시절’로 돌린다. 20년 넘게 하루 16시간씩 일해야 했던 지옥 같은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이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가난했던 과거만이 그를 만든 건 아니다. 그의 경영 원칙에는 ‘정직’이 항상 앞선다. 1983년 그가 수도계량기 공장을 인수해 흑자전환을 하자 지방정부는 그에게 세금 포탈과 부패 연루 혐의를 씌웠다. 1986년에도 압수 수색에 들어갔지만 정부는 매번 탈세 증거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차오 회장이 세금을 더 낸 것이 드러나 정부가 세금을 환급해준 일도 있었다.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불패 신화’

승부사 기질도 있다. 각종 반덤핑 분쟁에서 ‘불패 신화’를 쓰면서 그의 승부사 기질은 더 돋보였다. 중국산 자동차 유리 수출을 상대로 미국, 유럽 기업이 반덤핑 제소를 했을 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백을 주장했다. 캐나다국제무역법원으로부터 반덤핑 조사를 받자 회사 내 특별팀을 구성, 8개월간 캐나다로 파견을 나가 지루한 분쟁 끝에 캐나다 당국으로부터 중국산 자동차 유리가 캐나다 산업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 정부로부터 반덤핑 제소를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차오 회장은 소송 비용으로만 1억위안 이상을 썼고, 결국 푸야오의 승리로 끝났다. 푸야오그룹은 미 상무부를 상대로 승소한 최초의 중국 기업이 됐다.

고단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그는 요즘 여유롭게 골프를 즐기고 있다. ‘요즘 골프를 얼마나 치느냐’는 질문에 “한 번도 몇 타를 치는지 세어본 적 없지만 한 번 경기를 시작하면 이기고 만다”고 말한다. 또 과거 가장 행복했던 시간과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최고의 날은 매일 매일이고, 최악의 날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다 똑같다. 하루 얻으면 다음날은 사라질 것이고, 하루 잃으면 다음날은 얻게 될 것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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