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재벌(2) 일본 재벌 원조, 미쓰비시그룹의 탄생
<상>메이지유신 혼란기에 탄생한 일본 재벌 원조
1800년 대 중반 도쿠가와 막부 말기 일본에서 근대 기업이 탄생했다. 창업자는 도사번( 현 시코쿠 지역)의 하층 무사계급 출신인 이와사키 야타로. 그는 맨손으로 출발한 상인 자본가다. 정치상인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야타로가 내다본 미쓰미시재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미쓰비시그룹의 탄생과 성장 ***
미쓰비시 재벌의 성장 주역은 이와사키 야타로다. 야타로는 도사번(현 고치현)의 하층 무사 출신이다. 번의 실력자인 요시다 토요와의 인연을 계기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그는 1867년 ‘가이세이칸 나가사키상회’의 책임자로 발탁됐다.
가이세이칸 나가사키상회는 번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설립된 번 직영 상사였다. 나가사키와 오사카에 거점을 뒀다. 나가사키에 책임자로 부임한 야타로는 천부적인 상인 기질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도사번의 특산품 수출과 서양 국가들로부터 함선, 무기 수입으로 부를 늘려나갔다. 1868년 나가사키상회의 폐쇄 결정에 따라 오사카상회로 옮겨 도사번을 위한 무역 업무에 매진했다.
1870년 오사카상회는 이름을 ‘99상회’로 바꿨다. 야타로는 오사카에서 번으로부터 매입한 3척의 배를 기반으로 해운업을 시작했다. 사업 초기 도쿄~오사카, 고베~고치 간 화물 수송에 주력했다. 오사카 상인과 외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상품 매매도 했다.
메이지정부의 번 폐지 조치로 ‘도사번’이 없어지자 1873년 사명을 ‘미쓰비시상회’로 개명했다. 야타로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오너로 미쓰비시를 이끌게 됐다.
미쓰비시는 1874는 본사를 도쿄로 옮기면서 도약기를 맞는다. 메이지 중앙정부의 대만 출병이 회사 도약의 밑 거름이 됐다. 미쓰비시는 정부를 대신해 정잰 전략 물자 수송을 맡아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 1875년 ‘일본국 우편증기선회사’ 가 해체되면서 소유 선박은 미쓰비시로 넘어갔다.
야타로는 본사의 도쿄 이전에 맞춰 정부와의 업무 협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 회사 조직도 개편했다. 미쓰비시는 일본군의 조선 출병, 내전 때도 병력과 물자 수송을 담당했다. 정부의 홋카이도 등 국내외 항로 개척에도 앞장섰다. 미쓰비시가 일본의 해운을 독점하게 되는 배경이다.
야타로는 회사 운영에서 철저한 1인 독재 경영체제를 만들었다. 1875년 제정한 사내 규정의 제 1조에는 “회사 경영의 모든 결정, 상벌 등은 사장의 독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실려있다. 1878년의 새 사내 규정도 ‘사장 독재’를 공개적으로 명기했다.
경영인으로서 야타로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그는 맹렬한 ‘1인 사장’이었으나 인재를 발탁하는 혜안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친 동생으로 미쓰비시의 2대 사장에 오른 야노스케도 비슷했다. 그는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경영인이었으나 사원들을 사랑하는 온후하고 냉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야타로 초대 사장이 경영에서 ‘인재 등용’에 가장 신경을 썼다. 그는 서양문명 도입에 열심히던 후쿠자와 유키치 사상에 심취했다.서양 학문을 배운 학생이나 외국인을 적극 채용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초대 사장 야타로는 미쓰비시가 근대적 기업으로 진화하는 기초를 닦았다.
미쓰비시는 1878년 이후 보험, 광산, 은행, 부동산 등 각종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회사가 급성장하는 와중에 야타로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885년에는 ‘우편기선미쓰비시회사’와 ‘공동운수회사’가 합병해 ‘일본우선회사’로 변신했다. 미쓰비시재벌 본류 기업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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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최인한 뉴스국장 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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