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다. 여러 인종·민족의 이민으로 형성된 다인종 사회면서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융화된 사회를 이뤄내 붙여진 별칭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인종 문제는 복잡미묘하다. 관공서 안내문구에 ‘인종·성별·성적 취향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반드시 표시된다. 1950~1960년대 극심한 흑백 인종갈등을 겪었고 흑인 인권운동의 결과로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소수계 우대 정책)’이 도입됐다. 이 법안은 소수 인종이나 경제적 약자에 특혜를 주는 사회정책이다. 하지만 최근 미 대법원의 ‘미시간주 어퍼머티브 액션 금지 합헌’ 결정으로 50년 만에 소수계 우대가 폐지될 가능성이 커졌다. 반세기 전 인종 갈등에 근거한 법안이지만 백인 ‘역차별’ 논란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소수 인종은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 불평등을 외면하고 평등권 보호 정신을 훼손한 결정”이라며 비난한다.
미 대법원, ‘소수 우대 금지’ 합헌최근 미 대법원은 미시간주가 2006년 주민투표를 통해 ‘공립대에서 어퍼머티브 액션을 적용하지 못하도록 주 헌법을 개정한 결정’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 따라 미시간주 공립대는 신입생 선발 시 소수계 우대를 적용하지 않아도 민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워싱턴 등 7개 주(州)도 주민투표를 통해 법안 적용을 하지 않고 있다.이번 대법원 판결에 따라 나머지 주들도 법안을적용하지 않을 것으로예상돼 사실상 미 대입 전형에서 소수계 우대가 자취를 감추는 것 아니냐는 예측이 나온다.
미국 사회는 대법원 판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반세기 동안 소수계 우대가흑인·히스패닉계의 권익 향상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이번 결정이 소수 인종의 전반적 인권 후퇴로 이어질 것이라 우려한다. 히스패닉계 최초의 대법관 소니아 소토마요르는 “소수계 우대는 내 인생의 문을 열어준 정책”이라며 “대법원 판결은 평등권 보호 정신을 크게 훼손한 결정”이라고 힐책했다.
반면 미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란 분석도 적지 않다. 미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고 신생아 중 흑인·라틴·아시아계가 절반을 넘는 상황에서 소수계 우대의 회의론이 크게 확산됐기 때문이다.
성·인종 등 모든 차별 금지어퍼머티브 액션은 미국의 소수계 우대 정책이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인종·민족 차별을 없애기 위한 ‘동등고용기회위원회’를 설립하라는 행정명령으로 도입됐다. 3년 뒤 성·성적 취향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됐다. 이후 이 법안 정신에 따라 시행되는 모든 정책을 어퍼머티브 액션이라 부른다. 대표적 예가 대학 입학, 취업, 진급, 연방정부 사업에서 ‘사회적 약자’에 일정 쿼터를 줘 기회를 제공하는 조치다.
법안의 근거는 50년 전 극심한 인종갈등에 있다. 1950~1960년 심각한 인종차별로 흑인은 버스 좌석조차 달랐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하느님은 백인만 창조했다”고 주장했고 KKK와 같은 과격단체들은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이 소수인종 보호를 위해 법안을 공표한 것이다. 법안 시행 후 흑인·히스패닉계의 사회 진출과 명문대 진학률은 크게 높아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컬럼비아대 진학 때 소수인종 우대 혜택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흑인·히스패닉계는 백인의 대입 합격기준보다 20% 이상 낮아도 명문대 입학이 가능하다. 백인의 하버드대 입학 가능 SAT(미국의 대학수능시험) 성적은1450점(1600점 만점)이지만 흑인은 1200점만 넘으면 된다.
계속된 ‘백인 역차별’ 논란법안의 취지는 인종과 경제적 차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과거 인종 차별당한 계층에 보상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법안이 되레 새로운 차별을 만든다는 ‘백인 역차별’ 논란이 계속돼 왔다.
하버드대에서 흑인 학생들이 ‘소수 인종 우대 수혜자’라고 손가락질 받는가 하면 미시간대 로스쿨에 응시한 백인 3명이 어퍼머티브 액션의 희생양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백인 학생들은 더 높은 SAT 점수를 획득해도 백인이란 이유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는 것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과거 노예제도·인종차별의 역사적 부당함의보상이 법안 목적이라면, 그 부당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현재의 백인 학생으로부터 보상을 끌어내는 것이 정당한가?’라고 반문한다.
뉴욕타임스는 “소수인종 우대를 금지한 텍사스 플로리다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들의 주요 공립대 진학률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1998년 우대 정책을 금지한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대 히스패닉계 신입생 비율은 1990년 23%에서 2011년 11%로 줄었다. 흑인 신입생 비중도 8%에서 2%로 하락했다.
“대입정원 인종별 할당, 우수한 한국학생 역차별 받았는데”…교민사회는 ‘우대 금지’ 환영
한인사회 등 아시아계는 ‘소수인종 우대 금지 합헌’ 판결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번 판결에 따라 미국 대입 전형에서 인종이 아닌 성적·교외활동·봉사시간 등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인구는 4.5%이지만 상대적으로 성적이 우수한 아시아계 학생들의 명문대 입학 비율은 10~30%다.
그동안 미국 내 한인 학부모와 입시 관계자들 사이에는 아시아계 출신이 미국 명문대 진학에 가장 불리하다는 소문이 ‘정설
처럼 돌았다. 대학들은 인종별 다양한 학생이 분포되길 원하는데아시아계에 공부 잘하는 학생이 상대적으로 많아 아시아 학생에게 훨씬 높은 잣대가 적용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교육받은 아시아계 미국 학생으로 분류되는 것보다 외국 고교 출신 유학생 자격으로 지원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고교 때 한국으로 돌아가는 학생도 있었다. 통상 미국 대학은 9학년(한국의 중 3)을 전후해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미국 학생으로 간주한다.
프린스턴대 교수가 1980년대 프린스턴대 합격생을 대상으로 SAT 점수를 분석한 결과, 아시아계 학생은 흑인 학생보다 280점 이상 높은 점수로합격했다. 또한 ‘다른 자격 조건이 같은 경우 아시아계 미국인은 다른 인종 출신보다 SAT 성적이 50점 더 높아야 한다’는 프린스턴대 내부 보고서가 월스트리트저널에 보도된 바 있다.
1992년 미 연방정부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이 아시아계 지원자끼리 상대평가하고 있음을 밝혀 이후 대학 측이 이 정책을 폐기한 사례도 있다. 이 대학의 아시아계 합격률은 1997년 34%에서 2007년도에 42%로 높아졌다.
손정희 한국경제신문 연구원 jhs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