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태 정치부 기자,국회반장)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지난 10일 눈물을 머금고 기초선거 ‘무공천'원칙을 접었다. 정치권에선 ‘기호 2번’이 결국 안철수를 꺾었다는 말이 나왔다. ‘기호 2번'은 6.4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에 이어 새정치연합 후보들이 선거에 달고 나갈 수 있는 번호로, 제1야당의 기득권을 상징한다. 양측의 공천권행사로 선거의 ‘룰'이 확정됐다는 측면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의 ‘승패’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지난 1년을 끌어온 여야간 소모적 공방과 최근 야권의 내홍(內訌)을 일거에 잠재운 ‘해결사’는 박근혜 대통령도, 안 대표도, 정치권도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비유된 지방선거 파행을 막은 것은 단 한 번의 여론조사였다.새정치민주연합 탄생의 ‘탯줄’ 역할을 했던 ‘무공천'과 ‘궤멸적 패배'를 걱정한 현실정치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던 안 대표 등 새정치연합 지도부에게는 어땠을까? ‘국민과 당원의 뜻'을 묻는 여론조사는 ‘퇴로’인 동시에 ‘구원의 손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론조사는 입법 사법 행정 언론에 이어 제5부 권력으로 통한다.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 등 큰 판의 선거가 있는 해엔 여론조사는 ‘4.5부 권력’쯤으로 승격한다.(4.5부라 하는 것은 결국 ‘4부권력’ 언론의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공천권을 둘러싼 정치권 논란을 잠재운 ‘공’을 여론조사에 돌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이번 여론조사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실제로 새정치연합 내부에서도 조사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다. 먼저, 여론조사의 문구가 ‘공천유지’에 손을 들도록 설계됐다는 주장이다. 여론조사는 ARS(자동응답조사) 방식을 통해 “새누리당은 공천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새누리당이 공천을 하는 상황에서 공천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새누리당이 공천을 하더라도 애초의 방침대로 공천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라고 물었다. 질문 자체가 명백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지적이다. 당원이든 야당 지지자든 불리한 것에 대한 선택은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여론조사를 앞두고 양측이 문구를 놓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인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2002년 노무현과 정몽준 대선후보의 단일화 여론조사 때도 문구 하나를 놓고 양측이 마지막 시한까지 갈등을 빚은 사례가 있다. 노 후보측은 여론조사 문구에 “이회창 후보에 대항할 후보로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정 후보측에선 “이회창 후보에 경쟁력 있는 후보로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각각 놓고 한치 양보없이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최종문구는 “이회창 후보에 경쟁할 후보로 노무현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로 정해졌다. 여론분석가들은 노 후보 측에 유리한 문구 하나가 승패를 갈랐다고 평했다.
당원과 일반국민에 대한 설문항목이 다른 것도 이번 여론조사가 ‘짜여진 각본'이란 의혹을 사는 이유다. 새정치연합 당원들에겐 ’공천유지'와 ‘공천폐지' 등 2개 항목을 조사했다. 이에 반해 일반 국민들에겐 2개 항목 외에 ‘잘 모름' 항목을 추가시킨 것이다. 전문가들은 “설문 자체가 공천 찬성 답변을 유도하도록 설계된 데다 이 사안에 확신이 없는 공천폐지 쪽 일반인을 ‘잘모름' 쪽으로 흡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여론조사의 편향성이나 허접성에 상관 없이 선거 결과에 미칠 영향력이 크다 보니 ‘조작 유혹’에 빠져드는 것으로 분석된다. 실례로 2010년 한 지방선거의 공천 여론조사에 앞서 한 후보 측은 휴면 전화번호 2000개를 사들여 조사를 왜곡,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착신전환은 한 사람이 수백~수천의 표심인 양 여론조사를 왜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별·연령대별 비율까지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위사실 유포 사례도 많다. 2012년 대선 당시에 민주당 선대위 관계자는 새누리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조사 결과라면서 허위 사실을 트위터나 카톡 등 SNS로 유포해 유권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여론조사 범죄유형을 단속하고, 공정한 기준마련을 위해 공청회 등을 열고 있지만 제5부권력을 통제할 ‘뾰족한’ 방법은 없다. 이들 여론조사기관은 선거철만 되면 부동산의 ‘떳다방'처럼 우후죽순 처럼 생겼다가, 선거만 끝나면 자취를 감추곤 한다. 평소에 50개 남짓하던 여론조사 기관은 대통령선거나 지방선거 등 큰 판이 벌어지면 700개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게 업계 추산이다. 군소 지방언론등과 연계한 이들은 염가의 ARS(자동응답조사)방식으로 후보입맛에 맞는 지지율 조사 등 틈새시장을 파고 들어 한 몫을 챙긴 후 선거가 끝나면 사라지곤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유권자들 스스로 여론조사 결과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신껏 한표를 행사하는 것만이 통제받지 않는 ’제5부 권력'의 난립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끝)[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