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민경 기자 ]
# 출산 예정일보다 2주나 빨리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산모는 자연 분만으로 낳길 원했지만 담당 의사는 아기와 산모,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라며 수술을 통해 출산일을 당기라고 권고했다. 사실 의사는 출산 예정일에 개인 휴가가 잡혀 있었다. 산모는 자연 분만이 두려워 내심 수술을 고민했다. 그렇게 아기는 태어났고, 사람들은 기뻐했다. 갤럭시S5(아기)와 삼성전자(산모), SK텔레콤(의사)의 얘기다.
◆ "출시 아냐" 하루 만에 … 이통사 입김?
올 상반기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대어(大魚)인 '갤럭시S5'가 이통사(SKT)의 '막무가내'와 제조사(삼성전자)의 '모르쇠' 속에 27일 슬그머니 국내 시장에 나왔다. 지난 달 제품 공개 당시 발표했던 공식 출시일보다 2주 가량 이르다. 소비자는 물론 글로벌 이통사 앞에서 했던 약속은 깨졌다.
자식 같은 갤럭시S5를 약속 날짜보다 빨리 내놓게 된 삼성전자는 SKT를 향해 '유감'을 표명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조기 출시는 우리와 협의된 것이 전혀 아니고, SKT 발표를 통해 알았다" 며 "사전 마케팅을 위해 일부 공급한 물량을 이통사가 일방적으로 출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전날 조기 출시 여부를 묻는 기자들 진문에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결과적으로 빈말이 됐다.
SKT는 이날 갤럭시S5를 출시하면서 "소비자가 최고의 단말과 서비스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도록"이라고 설명했다. 갤럭시S5 기존 출시일이 SKT의 영업정지일과 겹쳐 출시를 서두른 것이라는 시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SKT가 제품 판매를 시작하자 영업정지중인 KT와 LG유플러스도 '기기 변경'은 가능하다고 대응했다.
이번 사건은 제조사와 이통사 간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삼성전자는 체급(시가총액)으로 보나 체력(실적)으로 보나 SKT에 아쉬울 게 전혀 없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제품을 만드는 제조사이고, SKT는 유통·판매하는 이통사다.
제조사가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소비자에게 실제 판매하는 건 이통사이기 때문에 이들이 제품 사양, 출시일, 가격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내 스마트폰 시장은 이통사를 통한 판매가 90% 이상이다. 이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스마트폰 업계 한 관계자는 "이통사는 제조사에 영원한 '갑'" 이라며 "가격은 제조사와 이통사 간 협의가 일반적이지만 출시일은 이통사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통사는 자신들의 판매 계획을 짜기 위해 제조사 측에 최소 6개월 분의 제품 라인업을 요구한다" 며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건 언제나 이통사"라고 말했다.
이통사 입김에 제조사가 눈치를 보는 상황은 해외도 다르지 않다. 일본 최대 이통사인 NTT도코모는 지난해 삼성전자와의 '밀월'을 끝내고 애플과 새로 손 잡았다. 자사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동지였던 삼성전자 갤럭시S4를 배제하고 애플의 아이폰5S와 5C를 전폭 지원한 것. 이에 따라 작년 4분기 일본시장에서 애플 점유율은 44.4%까지 치솟았다. 삼성전자는 6.9%로 추락했다.
애플은 지난해 세계 최대 이통사인 중국 차이나 모바일을 잡기 위해 보급형 아이폰5C를 처음 내놓았다. 13억 시장을 공략하고자 그동안 고수해온 '고가' 이미지를 스스로 버렸다. 애플은 중국에서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참석한 가운데 아이폰5S, 5C 출시 행사도 가졌다.
◆ 삼성전자, 끝까지 몰랐다 … 가능성 '글쎄'
삼성전자가 갤럭시S5 조기 출시를 몰랐다며 이통사에만 책임을 묻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게 업계 반응이다. 이통사가 아무리 출시 주도권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제조사의 동의 없이 판매하기란 불가능하다. 글로벌 기업답지 않은 책임 회피란 비판이다.
SKT가 사실상 세계 최초 출시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출시'라고 홍보 효과를 낮춘 것은 삼성전자와의 사전 협의 가능성을 높인다.
제조사와 이통사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가격은 출시 전날까지도 긴박하게 협의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해왔다. SKT는 이날 갤럭시S5 출고가를 86만6800원이라 발표했다. 또 5월19일까지 구매하는 소비자에겐 10만 원을 깎아준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출고가에 대해 "우리와 합의한 것이 맞는지 SKT에 물어보라"고 항변했다. 결국 가격도 이통사의 일방적 결정이라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전무후무한 이번 일에 대한 대응과 관련, "유감 표명 외에 추가적인 행동에 대해선 결정된 게 없다"고 한발 물러섰다,
몇 시간 전까지 사장이 직접 조기 출시를 부인한 것은 '면피'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비자에게 혼돈을 주고 해외 이통사들과의 약속을 어긴 셈이 됐다. 하지만 "어쨌든 우린 아냐"라고 빠져나갈 곳을 마련했단 것. 회사 관계자는 "신 사장 발언은 삼성전자의 출시 계획에 변함이 없다는 걸 재차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갤럭시S5는 세상에 나왔고 시장 반응은 예상대로 뜨겁다.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갤럭시S5 효과를 타고 130만 원 선을 회복했다. 시장 관심은 갤럭시S5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지다. 고가 스마트폰 시장 침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삼성전자 실적을 견인할 구원투수가 될지 이목이 쏠린다.
제조사와 이통사의 엇박자는 기억에서 쉽게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불협화음에서 진짜 잊혀지는 건 소비자와의 약속일지도 모른다.
한경닷컴 권민경 기자 k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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