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국가이다. 국가는 현대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고대인이 만든 발명품이며 우리는 여전히 국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고대사가 매력을 갖는 이유는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가 처음 만들어진 시대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고대사를 대할 때마다 처음 등장하는 사회제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국가는 군사력에 비교우위를 지니고 자신이 지배하는 영토 안에 거주하는 주민에게 ‘조세’를 징수하는 조직이라고 정의된다. 이러한 특이한 조직이 생겨나게 된 것은 사회의 필요와 군사력 보유 집단의 이익추구 때문이었다. 농업이 시작된 이후 토지와 물의 이용에 대한 분쟁이 빈번해지고 수리시설의 건설이나 관리와 같이 소규모 집단으로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경제문제가 생겨났다. 또한 대외적으로 사회를 방어할 필요가 생겼으며 대내적으로 사회 구성원 간의 폭력행사를 제한함으로써 질서를 수립할 필요가 증대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군사기술에 특화된 집단이 사회의 구성원에게 ‘조세’납부를 강제하는 동시에 분쟁을 조정할 제3자적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국가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의 등장은 경제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은 분명하지만, 구성원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단기적 전망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경제성장을 통해서 수입 증가를 도모하는 장기적 전망을 가질 것인가에 따라 경제적 성과에 미치는 효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국가 등장은 경제성장에 유리
한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국가인 고조선은 기원전 8세기께 이미 중국과 교류하였으며,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기원전 2세기께에 진국(辰國)이 성립해 있었다. 그 뒤를 잇는 삼한은 기원후 1세기 초에 78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소국은 규모가 다양하여 큰 것은 1만호, 평균 2000~3000호 정도의 주민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소국은 형태적 특징을 부각시켜 성읍국가라고도 불리며, 고조선이나 고구려도 처음에는 이러한 작은 국가에서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성읍국가가 합하여 연맹체를 이루고 이로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이 성립하였는데, 삼국은 기원 전후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여 기원후 3~4세기에는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이는 자생적인 사회발전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기원후 220년에 한이 멸망하고 위·진·남북조 시대(220~581)의 대 분열기로 접어듦에 따라서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약화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전쟁으로 영토넓혀 ‘규모의 경제’
많은 수의 소국(성읍국가)으로부터 삼국통일 후 국가의 숫자가 하나로 되기까지는 당연히 수 많은 전쟁이 있었다. 고대는 전쟁의 시대였으며 전쟁의 실행과 준비, 정복과 복속을 통해서 국가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국가는 규모의 확대에 비하여 비용은 그만큼 늘어나지는 않는 ‘규모의 경제’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정복과정에서 소국의 지배층은 일부는 몰락하고 일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한 귀족 신분으로 변화되어 갔지만, 주민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보다는 공동체 간의 위계관계를 이용하여 국가적 통합을 유지하였다. 또한 정복 과정의 사정을 반영하여 국가 안에도 권리와 의무가 불평등한 이질적인 지역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대국가의 한계는 왕권과 관료제가 강화되고 공동체로부터 가족과 개인이 자립해나가는 이후의 역사를 통해 극복될 것인데, 이점에서 율령의 반포는 큰 진전이었다(고구려 373년, 신라 520년, 백제는 3~4세기). 삼국통일 이후에는 국왕의 권력이 전제화되었으며 685년(신문왕 5년)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국가의 체모를 갖추었다.
고구려의 산성과 고분벽화, 백제의 석탑과 금동향로, 신라의 화려한 금관을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농업이 본격화되고 국가가 등장함에 따라서 경제적으로 큰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대국가 성립 후 인구 증가
먼저 인구가 증가하였다. 삼한의 소국이 78개였다는 기록에서 기원후 1세기경의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인구를 100만명이라고 한다면, 7세기의 삼국의 인구가 백제 100만, 신라 100만명, 고구려 150만~300만명이라고 추정되므로 6세기간에 대략 2배의 인구증가가 있었던 셈이다(고구려를 제외). 1인당 생산의 변화는 알 수 없지만, 인구증가는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이다.또한 농업기술이 발전하였다.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땅을 묵히는 휴경기간이 신석기시대에 15~25년 이상이었는데 청동기시대에는 5~10년으로 단축되어 중기휴경 단계로 진입하였다. 철기시대에 들어와서는 1~2년으로 휴경기간이 더욱 짧아졌으며, 삼국시대에는 이러한 단기휴경(휴한농법)이 정착되었다. 토지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철기시대이후에는 농기구에도 철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1세기경에는 철로 만든 괭이와 따비, 쇠스랑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6세기에는 소가 쟁기를 끄는 ‘우경’이 보급되었다. 쟁기의 사용은 농업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논밭을 깊이 갈아엎을 수 있게 됨으로써 수분의 증발을 막고 영양분을 고르게 퍼지게 하는 동시에 영양분이 많은 심층의 토양을 이용하고 잡초의 뿌리까지 제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농업기술의 발달에는 인구 압력뿐만 아니라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지증왕 3년(502)에 우경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선진 기술의 보급에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이야기해주며, 백제가 4세기에 벽골제를 구축한 것이나 백제의 무령왕과 신라의 법흥왕이 제방을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는 기록은 수리시설을 국가가 건설하고 관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가 제철산업 통제
철의 생산과 철제품의 제작도 국가가 독점하거나 통제하였다. 신라의 탈해왕(재위 57~80년)이 단조 기술을 가진 장인 출신이었다는 점과 4~5세기의 신라와 가야의 대형 고분에서 집게, 망치, 모루와 같은 제철용 도구들이 출토되었다는 점, 그리고 삼국통일 후에 문무왕이 전국의 무기를 모아서 농기구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중국이나 일본과 동일하게 신라에서도 국가가 철제 농기구의 생산을 관장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는 독점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다단계의 생산공정과 온도와 탄소함량의 조절에 숙련이 요구되는 철제품 생산과정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권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신라 490년 경주에 최초 시장
이밖에도 ‘기촌’(器村)이라고 새긴 7세기경의 신라토기는 토기제작을 전업하는 마을이 있었음을 추측케 하며, 토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건들이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신라에는 ‘와기전’(瓦器典)이라는 관서가 있었으며 백제에도 ‘와박사’(瓦博士)라는 관직이 있었다. 시장도 국가에서 설치하고 관리하였다. 신라는 490년에 서울(경주)에 최초로 시장을 열었으며, 509년에는 동시를, 695년에는 서시와 남시를 개설하였다.
시장경제의 발전이 미약하였기 때문에 국가와 귀족이 사용할 물자는 현물로 지방에서 중앙으로 집중되었으며 노동력이 무상으로 동원되었다. 이로써 거대한 영조물의 건축과 귀족들의 화려한 소비가 가능하였다. 문자 기록이 국가와 귀족의 독점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철과 같은 중요한 물자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중앙의 귀족과 지방의 농민 간에는 커다란 경제적 격차가 생겼다. 통일신라시대의 수도 서라벌을 벗어나 지방으로 가면, 금을 입힌 집,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는 화려한 도시는 사라지고 초가와 움집으로 이루어진 질박한 농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사회의 최하층에는 노비를 비롯한 천인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재호 <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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