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서 첫 근대한국인 탄생
과거사 자폐증으론 성장 못해
中·日 모두 안아야 근대화 완성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공산주의가 한낱 싸구려 이념으로 전락한 뒤끝을 잘 보여준다. 한때의 강고한 동맹이 정체도 불분명한 민족을 뛰어넘지 못한다. 소치 올림픽 관중석은 베이징 못지않게 일방적이었다. 그렇게 민족이라는 이름의 어깨들이 설쳐대고 있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래, 서유럽은 마치 민족국가로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로 시작하는 저 유명한 에르네스트 르낭의 연설은 민족은 허구라는 주장에 온통 바쳐졌다. 민족은 사이비 개념에 불과하다는 웅변이었지만 그가 주장하는 보편국가나 세계는 전진하는 ‘독일 민족’ 앞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민족은 고대의 영웅담을 재구성해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기에 멀쩡한 지식인들도 종종 과거의 화려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느라 정신을 온통 빼앗긴다. 요즘 한민족 고대사를 재구성하기에 바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같은 경우도 그럴 것이다. 민족이 탄생한 것은 혼란스럽던 프랑스 혁명의 저 불온한 밤이었다. 그것은 점차 괴물처럼 자라났다. 혁명수비대의 암구호로 등장한 ‘민족’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확산을 타고 갈수록 위력을 더하는 중이다. 사실 첫 민족국가는 네덜란드였다. 이어 미국이 태어났다. 이들 열린 민족주의는 구심력이 약하고 금세 잊혀졌다. 강한 민족주의는 종종 폭력적이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그랬다.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지만 역시 3·1운동으로 기점을 잡는 것이 옳을 거다. 개항과 동학혁명까지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원을 끌어올린다고 정당성이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총독체제가 되고서야 민족은 화들짝 깨어났다. 국민보다 국민학교가 먼저 만들어졌다. 탁석산은 나라가 없었던 일제하였기에 국가의 대체물로서 민족이 필요했다고 본다. 임지현도 “만들어졌다!”는 데 동의하는 것 같다. 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은 한낮 조선왕조의 부활을 요구하는 데 그쳤다. 양반이 주인이었다. 3·1에 와서야 비로소 공화정을 국체로 하는 근대국민이 태어났다.
이영훈 교수는 민족은 러일전쟁 이후에야 한국에 수입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민족주의 대표를 자처하는 동학만 하더라도 3·1운동까지는 친일과 근대화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했다. 경위야 어떻든 민족은 그렇게 커 나갔다. 상하이임시정부가 출범하고 무장투쟁이 시작된 것들이 모두 아직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열정이었다. 일제하 사회주의, 아나키즘, 공산주의적 열정과 투쟁들은 사실 그들의 나중 주장과는 달리 민족에 바친 것이 없다.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반제 동맹기구를 구축했을 뿐 반일 민족투쟁을 조직했던 적도 없다. 좌익 일부에서 민족을 앞장세우는 것은 그래서 더욱 우습다.
박근혜 대통령의 3·1절 기념사가 통일 문제를 강조한 것은 올바른 관점이다. 위안부 문제에서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대목은 일본도 세심히 들여다보기 바란다. 민족의 역사를 고난의 노정이요, 피해자의 운명으로만 정의할 수는 없다. 만주벌판에서 말 달리는 식의 고대사 판타지도 문제지만 민족의 근대사를 능욕과 박해, 착취, 고난으로만 서술하는 것도 지나친 콤플렉스다. 피해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일 수도 있다.
3·1운동은 관 뚜껑에 못을 박아 박물관에 넣어 둘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3·1의 대립항을 일본이라고만 생각하면 현재 시점 착시다. 좌익이야말로 종종 민족주의 탈을 쓴다는 날카로운 지적도 잘 새겨야 한다. 그들은 종종 일을 그르친다. 타자가 나의 경험을 아파해주지 않는다고 마냥 투정하는 것은 소아병적이다. 반일조차 넘어서야 통일이 가능하다. 일본과 중국 모두를 싸안아야 한다. 그들에게 칭얼대기만 해서야 통일이 되겠는가. 1919년에 시작된 근대화가 이제 95년이다. 100년이면 자유통일이 완수되어야 한다. 그게 3·1절에 새겨야 할 각오의 전부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