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태 정치부 기자, 국회반장) 지난해말 지지율이 한자릿수로 추락하면서 민주당에 위기감이 엄습했을때다. ‘실체'도 없는 안철수 신당의 지지율이 3배이상 웃도는 것을 일시적 현상으로 평가절하했던 당 지도부도 ‘홈그라운드'인 광주 전남지역의 민심이 돌아서는 것을 확인하곤 ‘심장’이 오그라드는 통증을 느꼈다.
당시 민주당 한 소장파 의원이 술자리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민주당을 살릴 ‘해법’을 내놓았다. 민주당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안철수 신당을 중심으로 새판을 짜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민주당을 통째로 안철수에게 갖다 바쳐야지, 현재 민주당으로선 ’철옹성' 같은 새누리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아올 길이 없다"고 했다. 이어 “안철수가 받아 줄리가 없을테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난 2일 김한길 대표(민주당)와 안철수 위원장(새정치연합)이 ‘제3지대 신당 창당'을 선언하는 순간, 기자는 수개월전 소장파 의원이 했던 얘기가 퍼뜩 떠올랐다. 비록 형태는 달라도 현역의원 2명 뿐인 안철수 신당과 62년 정통야당의 맥을 계승한 민주당(의원수 126명)이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화학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 여당을 견제할 통합신당 창당이 논의(1일 오전 8시30분 첫 회동)에서 최종합의(2일 새벽 12시40분) 까지 걸린 시간이 16시간 10분에 불과한 점,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을 빼곤 측근조차 기자회견을 통해서야 알게 된 점 등은 양당 통합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이뤄졌는지를 방증한다.
지방선거를 불과 90일 남짓 앞둔 상황에서 통합신당이란 ‘깜짝카드’는 누가 뭐라도 ‘김한길’과 ‘안철수’의 공동작품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새정치=안철수'란 브랜드 훼손을 우려하는 안 위원장을 끝까지 설득하고, 126명 대 2명의 당을 5대 5 지분으로 ‘제3지대’에서 창당키로 결단했다는 점에서 김 대표의 ‘개인기'가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많다.
3연(緣·지연 학연 혈연)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궤적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없는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이 현대 정당정치사에 ‘한 획'을 그을 극적 합의를 성사시킨 배경은 뭘까.
둘은 정치적 노선을 초월한 서로 인간적 신뢰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가 사석에선 “철수야"라고 부를 정도의 친밀감이 이번 합의에 크게 기여했다는 게 김 대표 최측근의 분석이다. 53년생인 김 대표는 안 위원장(62년생)보다 9살이 많다.
몰론, 기초선거 공천권폐지에 대한 공조와 “(이러다간) 지방선거 필패"란 위기의식, ‘당권과 대권’에 대한 정치공학적 배분 등이 두루 두루 영향을 끼쳤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100년 정당을 하겠다" “민주당과 같은 배를 탈일은 없다”는 공언에다,민주당 주류인 친노파에 대한 앙금 등을 감안할때 안 위원장이 정치적 멘토인 윤여준 (새정치 연합 공동위원장)에게조차 일언반구도 없이 결단을 내린 데는 김대표와의 ‘특별한 인연'을 빼놓곤 설명이 안된다.
김 대표는 새정치연합측이 독자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야권분열 우려가 제기될때마다 느긋한 자세를 견지해 주위의 애를 태우곤 했다고 한다. 그는 야권연대에 무슨 복안이 있냐는 질문엔 “철수는 나에게 맡겨"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전해진다.
안 위원장과 인연은 김대표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93년께 방송인으로 활동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대표는 자신이 진행하던 ‘김한길과 사람들'이란 방송 프로그램에서 컴퓨터 백신을 개발한 청년 의사 ‘안철수’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첫 만남에서 서로 인간적 호감을 느꼈지만, 이후 정치와 비즈니스의 전혀 다른 세계에서 각자 길을 걸었다. 그러다 김 대표는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새정치 국민회의 국민자문단 단장을 맡으면서 자문위원으로 안철수 사장을 끌어들여 인연을 이어갔다.
둘이 급격하게 친해진 계기는 김 대표가 2008년 18대 총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정계를 은퇴하면서부터다.
김 대표는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당시 ‘울림'있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그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의 실패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면서 사죄하는 심정으로 18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거창하게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다시는 정치에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 “우리당의 대선참패 이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매우 아프다. 나를 버려서 우리가 살아나는데 도움이 된다면 우선 나부터 기득권을 버려야겠기에 총선 불출마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눈을 감고 들으면 안의원 화법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새정치를 표방하면서 안 위원장이 했던 발언들과 겹쳐지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현역의원 141명 가운데 정계은퇴 및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은 김 대표가 유일했다.
안 위원장은 김대표의 정계은퇴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성 정치에 대한 차별화로 내세운 안철수식 ‘새정치'의 콘셉트도 김 대표의 총선불출마및 정계은퇴 등에서 일부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어쨌든, 김대표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백수'가 된 후로 거의 매일 안 위원장을 만났다고 한다.이때 부터 둘은 ‘절친’이 됐고,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은 정치공학적 이해관계와 ‘각별한' 인연으로 손을 맞잡았다. 둘의 인연은 통합신당이란 ‘깜짝카드'를 ‘번개불에 콩구워먹듯’ 성사시키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앞으로 둘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통합신당의 지분분배는 물론이고 이념적 갈등 등 화학적결합의 후유증도 예상된다. 한때 정치권을 집어삼킬 듯 했던 ‘안풍(安風)’강도 만큼은 못하지만, 앞으로 통합신당이 정당정치에 시너지효과를 창출할지 아니면 정치적 야합의 또 다른 형태가 될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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