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 별에서 온 그대
'초치는 능력'이 초능력?
노하우 전수는 모르쇠, 후배 갈굴 땐 무쇠…의욕 꺾는 능력만 보면 외계인이 틀림 없어
초능력 능가하는 성실함
이유불문 지각은 1초도 안돼
눈보라 뚫고 행군해 출근
일 떠맡길 때 순간이동 하고파
회식 때만 목소리 큰 이과장
업무시간에 그런 존재감 좀…
[ 전설리 / 박신영 / 임현우 기자 ]
대기업 A사에 근무하는 한 과장은 별명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다. 법학 의학 경제 분야는 물론 패션 예술 쪽까지 줄줄 꿰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다른 사업부의 임원까지도 가끔 그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묻곤 한다. 친절한 한 과장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질문이든 환영이다. 이러다 보니 업무 처리보다는 상담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일도 적지 않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별그대)’의 주인공 도민준(김수현 분)을 연상시킨다. 외계인인 도민준은 1609년 지구에 떨어져 고향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400여년간 한반도에서 살고 있다. 그는 지구인보다 청력이 뛰어나고 순간이동하거나 시간을 정지시킬 수도 있다. 사물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염력과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도 있지만, 지구인 여자(전지현 분)와 사랑에 빠져 서서히 자신의 신분을 잊어간다.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면서 김과장 이대리들 사이에서도 직장 내에서 ‘신기한(?)’ 능력을 발휘, 외계인 취급을 받는 ‘별난 그대’들이 관심을 받고 있다.
○윤 부장 귀는 ‘소머즈 귀’…“다 들려”
중소기업 B사에서 일하는 윤 부장은 사내에서 초능력자로 통한다. 윤 부장의 ‘괴이한’ 능력 때문에 직속 부하인 김 과장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언제 어디서든 김 과장의 대화 내용을 엿듣고 수시로 ‘지적질’을 해댄다.
윤 부장의 청력은 경이로울 정도다. 어느 날 김 과장이 거래처와 막 통화를 마쳤을 때다. 윤 부장이 소리쳤다. “그게 아니잖아.” 김 과장은 사무실임을 감안해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통화했고 윤 부장의 자리와는 5m가량 떨어져 있다. 김 과장 옆자리에 앉은 이 대리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저도 못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으신 걸까요. 혹 소머즈 귀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사무실뿐만이 아니다. 한 번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회사 근처에서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던 김 과장은 깜짝 놀랐다. 윤 부장 얘기를 막 꺼내던 순간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무슨 얘길 그렇게 즐겁게 하나. 일을 그렇게 즐겁게 하지.”
다음날 아침 윤 부장이 진짜 초능력자임을 확신(?)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거래처 사람들과 과음한 탓에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있던 김 과장에게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윤 부장이었다. “거래처에 그런 얘길 도대체 왜 한 거야.” 자신이 참석하지도 않은 술자리에서 오간 얘기까지 다 알고 있는 윤 부장. 김 과장의 머리 속에 문득 ‘외계인’이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한 번만 봐도 ‘우리편’ 만드는 능력
대기업 C사에 근무하는 이 부장은 EQ(감성지수)형 초능력자다. 사람을 홀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처음 보는 사람도 마치 오랜 친구와 같이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그와 술자리를 한 번 가지면 누구든 ‘이 부장의 사람’이 된다. 덕분에 이 부장의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5000개가 넘는다. 기업인 정치인 교수 기자 심지어 연예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5000개도 모자라 하루 평균 10개씩 늘어나는 듯하다. 마치 전화번호가 자가증식하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넓은 인맥을 기반으로 어려운 일도 척척 해결한다. 무슨 일이 터져도 접촉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보를 모두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장을 직속 상사로 모시고 있는 김 대리는 말한다. “이 부장을 보고 있으면 한국뿐 아니라 저 멀리 중동이나 아프리카에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한국 사회는 역시 인맥이죠.”
○안되면 ‘군인정신’으로
대기업 D사에서 일하는 지 과장은 성실함과 책임감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10여년 만의 대폭설로 출근길 대란이 벌어진 작년 2월. 지 과장은 밤새 폭설이 내릴 것이란 일기예보를 듣고 평소보다 훨씬 이른 오전 6시께 집을 나섰다. 세상은 이미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처럼 ‘눈의 고장’으로 변해있었다. 간신히 버스를 탔지만 거북이처럼 느렸다. 출발한 지 10여분이 지났는데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100% 지각. 지 과장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내려서 평상시 차로 20여분가량 걸리는 회사까지 걷기로 했다.
눈보라는 생각보다 거셌고 거리엔 인적이 전혀 없었다. 지 과장은 군대 시절 완전무장을 하고 야간행군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진군을 시작했다. 그렇게 칼바람을 뚫고 걷고 또 걸었다.회사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30여분. 사무실에 도착한 시간은 8시 5분 전이었다. 지각을 면하는 데 성공.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선 지 한참이 지나도 출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폭설에 발이 묶여 모두 지각을 한 것이다. 결국 지 과장은 오전 10시까지 혼자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나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중소기업 E사에 다니는 김 대리는 요즘 선배 이 과장 때문에 죽을 맛이다. 업무를 밥 먹듯이 미루기 때문이다. 김 대리는 팀의 막내지만 같은 팀에서 3년간 근무한 베테랑이다. 이 과장은 올해 초 김 과장과 같은 팀이 됐다. 업무를 배워야 하는데 미루기만 하는 것이다. 성격도 괴팍하다. 조금만 대답이 늦거나 기분이 나쁘면 바로 인상을 쓰고 김 대리를 못살게 군다.
근무시간엔 일을 미루기만 하는 게으른 이 과장이지만 저녁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술자리에선 그렇게 적극적일 수가 없다. 문제는 술자리마다 김 대리를 끌고 다닌다는 것. 때문에 김 대리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괴롭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기가 싫을 정도다. 그때마다 김 대리는 ‘도민준처럼 초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상상을 한다. 이 과장이 업무를 떠넘기려 할 땐 순간이동으로 자리를 피하고, 술에 취해 같은 말을 되풀이할 땐 시간을 멈춰버리고 싶다. 그나마 이런 상상이라도 하면 그런대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고.
전설리/박신영/임현우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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