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종 국제부 기자)
“문화상품은 다른 상품과 다릅니다.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가 택한 길입니다”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의 초대 큐레이터였으며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13년간 루브르 박물관의 수장을 맡은 앙리 루아레트.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프랑스 측 집행위원장이라는 새로운 직함으로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가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프랑스만 예외적으로 문화산업을 제외하려고 하는데, 다른 부문은 개방하면서 이 부문만 보호하려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실제로 현재 프랑스의 ‘문화산업 예외주의’로 인해 미국과 EU의 FTA는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다른 EU 국가들은 받지 않는 특혜를 혼자 받겠다는 격이니 얼핏 떼를 쓰는 것처럼 보입니다. 프랑스 문화계를 대표하는 정부 인사로서 책임 있는 답변을 기대했습니다.
190Cm 정도의 큰 키에 날렵한 남색 수트 차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을 받던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말랑말랑한 행사 기획 질문 중에 나온 다소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일 겁니다. “문화 산업 예외주의가 정부의 방침”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이 돌아 왔습니다. 자국 문화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부연도 곁들였습니다. 오히려 FTA를 통해 프랑스의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렇다고 프랑스의 문화 산업이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며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프랑스에서 개봉하고 케이팝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어 “한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문화를 중요한 산업 분야로 보고 있다”며 “프랑스는 자동차 산업보다 문화 산업으로 버는 돈이 5배가 넘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충분한 답이 되진 못했습니다. 프랑스 문화 산업의 저력과 개방성을 얘기하면서도 미국 문화는 배타적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는 모순된 논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의 어마어마한 자본력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문화의 고유성이 훼손되고 시장이 잠식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문화’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프랑스가 내린 결정 치고는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오히려 높은 문화의 힘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난해 8월 프랑스 르몽드지는 한·미 FTA로 인해 한국 문화산업이 위축됐다며 프랑스의 문화산업 예외주의를 관철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스크린쿼터 제도와 막대한 지원금 없이도 한국 영화는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내 흥행 순위 10위권 영화 중 9개가 한국영화였습니다.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됐습니다.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는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오히려 미국 문화의 유입을 차단하는 프랑스의 예외주의가 문화적 다양성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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