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모를 불황의 터널에서도 남다른 노력과 혁신,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우뚝 선 성공기업들의 숨은 이야기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한경닷컴 산업경제팀 기자들이 취재현장에서 발굴한 기업들의 생생한 성공스토리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도전과 위로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 <편집자 주>
[ 노정동 기자 ] 반세기 가까이 유아식 하나만을 고집하며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로 성장한 기업이 있다. 올 여름 식품업체들의 고질적 질병인 '밀어내기'와 '개구리 분유' 파동으로 한때 휘청거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남양유업이 그 주인공이다.
창립주인 홍두영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첫 번째 정권을 잡은 후 2년 뒤인 1964년 남양유업을 설립했다. 6·25 전쟁 이후 6.3명에 달하던 높은 출산율로 골머리를 앓던 정부의 고민을 옆에서 지켜보던 홍 회장은 분유와 이유식 등 영유아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고자 유아식 사업을 시작했다.
1970~1980년대 한국의 급격한 경제성장과 높은 출산률 덕에 승승장구하던 이 거대 유아식 기업에 창립 이후 최대 위기가 닥쳤다. 2000년대 들어 세계보건기구(WHO) 194개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할 정도로 국내 출산율이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출산율 저하와 함께 남양유업의 매출도 고꾸라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유아식에 이어 남양유업의 새로운 반세기를 책임질 차세대 먹거리 개발이 절실했다. 창업주에 이어 회사를 물려받은 장남 홍원식 회장은 '커피'를 남양유업 제2의 먹거리로 정하고 2년 간의 연구개발 끝에 인산염을 제거한 커피믹스 '누보'를 시장에 내놨다. 커피믹스에 들어가던 첨가물을 80% 가까이 제거한 새로운 제품이다.
남양유업을 분유 전문기업에서 커피 전문기업으로 탈바꿈시킬 '누보(Nouveau·프랑스어로 '새로운'이라는 뜻)'를 맨 앞에서 진두지휘한 이기웅 생산개발총괄본부장(45·사진)을 만나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제품 개발 이야기를 들어봤다. 내년이면 50주년을 맞는 식품기업의 위기 탈출기다.
◆ 남양유업의 간판 '이유식'의 부진…"제2먹거리 찾아라"
남양유업은 국내 조제분유 시장 점유율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내 대표적인 유아식 전문회사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남양 전체 매출 중 분유 매출이 50% 이상일 정도로 이 회사의 기둥은 누가 뭐래도 이유식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세계보건기구에 가입된 194개 국가 중 출산율 최하위(1.2명)를 기록할 정도로 국내 산부인과에서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는 점차 들리지 않았다. 영유아들이 곧 소비자인 남양유업 입장에선 기업이 휘청댈 정도의 위기가 닥친 셈이었다.
"1990년대에는 연간 70만 명 이상이던 신생아 수가 최근에는 40만 명대까지 떨어졌어요. 이제 곧 30만 명대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들리고요. 회사 입장에선 분유 매출은 갈수록 줄어드는 데다, 유제품 시장은 외국 회사까지 가세한 포화된 상태여서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매출에도 직결됐다. 회사를 먹여살리던 분유 사업의 매출이 최근 20%대까지 추락했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커피믹스의 매출액(2198억 원)이 조제분유의 매출액(1945억 원)을 앞지르기도 했다. 커피 매출이 매해 두 배 이상씩 급성장하는 동안 분유 사업은 총 2억 원 늘어나는 데 그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창업주의 장남인 홍원식 회장은 2011년 처음으로 회사 내 'TF(태스크포스)'를 꾸리고 '커피'를 남양유업의 차세대 먹거리로 결정했다. 국내외 커피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는 점과 분유 기술을 커피믹스 생산에 적용가능하다는 점이 커피를 제2의 먹거리로 결정한 이유였다.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 중국, 러시아만 해도 커피시장이 15조 원입니다. 국내 시장까지 포함하면 16조 원을 훌쩍 넘는 셈이지요. 국내의 경우 동서식품이 줄곧 80%의 점유율을 가져갔고, 중국의 경우 상위 두 개 회사(네슬레, 크래프트)가 전체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할 정도로 독과점이 심한 시장이 바로 커피 분야입니다."
독점시장은 1위 기업의 인지도를 따라잡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워 시장 진입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혁신적인 제품으로 '콘크리트 구조'를 깰 수 있다면 소비자들이 빠르게 다른 '맛'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소비자들은 한 가지 맛에만 익숙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커피는 기호식품이기 때문에 기존에 마시던 제품을 계속 찾는 경향이 있어요. 시장 자체에서 선택지가 많지 않은 것도 독과점 시장이 굳어지는 이유고요. 그러나 남양유업이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내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면 소비자들이 빠르게 눈을 돌릴 수 있겠다는 판단이 커피 사업을 제2의 먹거리로 정한 이유였습니다."
◆ '차별화'에 대한 2년 간의 고민…"인산염을 제거하라"
누보가 남양유업의 첫 번째 커피믹스는 아니다. 앞서 2010년 남양유업은 '카페믹스 프렌치카페' 시리즈를 들고 이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당시 남양유업은 '카제인나트륨 無 첨가'로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커피믹스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차별화에 더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1위 기업의 커피 맛에 소비자들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차별화였고 당시 남양유업은 분유를 만들던 기술을 활용해 크리머에서 카제인나트륨 성분을 제거한 커피믹스를 출시했던 것이지요."
남양유업은 첨가물을 제거한 '건강한 커피믹스'를 내세우며 시장 진출 1년 만에 점유율 2위로 올라서는 등 생각보다 빠른 결과물을 냈다. 남양유업이 또 다시 첨가물을 제거한 커피믹스를 내세운 데는 이 같은 경험이 작용했다.
"프렌치카페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남양유업이 얻었던 교훈은 소비자들이 최대한 자연식품에 가까운 음식을 선호한다는 점, 경쟁사보다 잘 할 수 있는 크리머에서 차별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커피믹스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우선 커피 생두의 맛이다. 원산지에 따라 산미(신맛)가 다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크리머다. 크리머란 커피에 넣어 마시는 크림이나 우유의 맛과 비슷한 첨가물을 뜻한다. 세 번째는 커피, 크리머, 설탕의 배합 비율이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커피믹스의 맛은 '구수함'이에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나라별로 맛에 대한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지요. 결국 맛의 차별화는 크리머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이 때문이에요. 변화를 줘야한다면 크리머를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남양유업은 크리머에 들어 있는 여러가지 첨가물 중 카제인나트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첨가물인 인산염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인산염 자체가 유해한 성분은 아니지만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들의 특성 상 과잉 섭취의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쌀에는 인 성분이 다량 포함돼 있다.
"카제인나트륨과 인산염은 그 자체가 유해한 성분은 아니에요. 최근 들어 각종 음식에서 나트륨 줄이기 운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과잉 섭취했을 경우 건강에 안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를 제거할 수 있다면 고객들이 더 안심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문제는 맛이었다. 인산염을 제거하면 커피믹스 특유의 '구수하고 묵직한 맛'을 살릴 수 없었다. 제조회사들이 크리머에 인산염을 함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0년 가까이 분유를 제조하던 기술을 통해 인산염을 대체할 수 있는 자연식품을 개발했어요. 합성 첨가물을 제거하면서 자연재료로 이를 대신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 '커피' 전문기업으로의 탈바꿈…'국내 최대 커피전용공장 건설"
남양유업이 커피 전문기업으로 탈바꿈을 선언한만큼 그에 따른 준비도 필요했다. 기존 커피믹스는 다섯 곳에 흩어져 있는 유제품 공장의 일부 라인을 빌려 생산한 게 전부였다.
"커피전용공장을 짓지 않으면 맛에 대한 개선도, 생산량의 증가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전용공장 없이는 배합을 조절하거나 생산량을 증감하는 문제들에 신속히 대처할 수 없었거든요."
커피믹스 시장에 뛰어든지 1년 만에 남양은 2000억 원 규모의 대형 커피전용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고 세계 각지로 연구원들을 파견했다. 커피공장 생산설비를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미국, 유럽, 남미 등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로스팅을 잘하는 곳, 추출 기술이 뛰어난 곳, 동결 건조에 탁월한 제조회사 등 여러 기업의 생산설비를 둘러봤어요. 남양유업은 어느 한 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각 기업들이 갖고 있는 최고의 기술만을 선별해 공장을 건설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2011년 전라남도 나주에 부지를 선정해 착공에 들어간 남양유업 커피전용공장은 2년만인 지난달 완공, 연간 7200톤의 동결건조 커피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이는 1년 마다 50억 개 커피믹스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나주 공장 준공은 영하 45℃의 진공상태에서 동결건조를 통해 커피 본연의 맛과 풍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최신 설비를 도입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또 기존 남양 제품의 단점으로 지적됐던 향 부분에 대한 보완도 이뤄질 수 있게 됐고요. 남양이 '분유' 전문회사에서 '커피'회사로 거듭난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공장입니다."
◆ "소비자 반응 고무적…3년 안에 커피믹스 시장 1위 달성 목표"
이 본부장은 누보를 출시하기 전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커피믹스 블라인드 테스트한 결과를 소개했다. 커피믹스는 제품의 특성상 한 번 선택한 브랜드를 잘 바꾸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게 이 본부장의 설명이다.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소비자의 선택은 누보 60%, 경쟁사 40% 비율로 집계됐어요. 사실 커피믹스는 한 번 제품을 선택하면 그 맛을 바꾸기 쉽지 않거든요. 소비자들의 이 같은 선택은 제품 개발에 참여한 남양유업 임직원들이 큰 힘을 얻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남양유업은 현재 국내에서 15% 안팎의 커피믹스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남양은 이번 신제품 커피전용공장 건설과 누보 출시를 계기로 3년 안에 이 시장 1위 기업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아라비카의 비율을 20% 끌어올린 데다 그동안 남양유업 커피믹스의 단점으로 지적됐던 '향' 문제도 보완을 마친 상태입니다. 소비자들의 대다수가 '남양 커피는 향이 부족하다'고 언급했던 점을 반영했습니다. 남양유업 임직원 모두 제품만큼은 경쟁사보다 자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남양유업은 아울러 3년 안에 해외시장에서 연간 1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도 세웠다. 타깃은 중국, 러시아, 일본 시장이다. 접근성과 시장 규모를 고려했다는 게 이 본부장의 설명이다.
"수출시장은 최소 세 개 나라만 해도 15조 원 규모입니다. 남양유업이 점유율 1퍼센트만 차지해도 1조5000억 원이라는 시장이 생기는 거예요. 분유로 쌓아올렸던 남양의 기술이 이제는 커피로 옮겨 가고 있어요. 세계 어느 나라 국민들의 입 맛에도 잘 맞게 만들 자신 있습니다."
한경닷컴 노정동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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