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슬램 욕심냈더니 행복이 잠시 길 잃어
"자신의 행복 위해 골프 쳐라" 후배들에 조언
[ 서기열 기자 ]
“‘올해보다 내년에 조금만 더 행복해지자’고 매년 목표를 세웁니다. 그러다보니 골프에서 결과가 따라오더군요. 후배 선수들도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골프를 쳤으면 합니다.”
‘골프여제’ 박인비(25·KB금융그룹)는 결과보다 행복을 좇는 골프 선수였다. 올 시즌 미국 LPGA투어에서 메이저대회 3승을 포함해 총 6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상금왕에 오른 뒤 한국인 첫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한국에 돌아온 박인비를 29일 서울 논현동 IB월드와이드 사옥에서 만나 그의 ‘행복론’을 들어봤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지난 23일 올해의 선수 수상식에서 박인비가 했던 수상소감 연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당시 박인비는 10여분 동안 영어로 행복을 이야기하며 참석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했다. 박인비는 가족, 약혼자, 캐디와 더불어 2008년부터 자신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해온 IB월드와이드에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박인비는 “올해의 선수 수상이 마지막 순간에 결정나는 바람에 준비할 시간이 촉박했다”며 “한국 선수로선 처음으로 타게 됐으니 한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남은 4~5일 동안 하루에 한두 시간씩 열심히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대회(CME그룹 타이틀홀더스) 1, 2라운드 땐 시합하면서도 오로지 수상소감 연설만 생각했을 정도”라며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 뒤에 숨겨진 저의 솔직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골프를 쳐라”
연설에서 ‘행복’을 강조했던 박인비에게 행복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프로골프 선수로서 골프를 즐기면서 칠 수 있는 게 저의 행복이죠. 골프가 지겨워지고, 잘해야만 하는 일이 되는 순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습니다. 결과만 좇는 것은 스스로를 힘들게 할 뿐입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시합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멘탈 트레이닝을 담당하는 조수경 박사와 상담하면서 어떻게 행복한 사람이 돼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작년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자’고 마음 먹었는데 올해 좋은 결과가 따라왔다고 덧붙였다.
‘세리 키즈’ 세대로서 세계 정상에 오른 박인비. 그에게 자신을 롤모델로 삼고 연습에 매진하고 있을 ‘인비 키즈’ 세대는 어떻게 골프를 해야 할지 조언을 부탁했다.
“저도 부모님이 시켜서 골프를 시작했고 예전에는 부모님을 위해, 주변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쳤어요. 프로가 되고 난 뒤부터 그러다 보면 제 행복을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후배들에게 자신을 위한 골프를 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왜 골프를 해야 하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지를 찾으면서 골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을 버리니 좋은 결과”
올 시즌 행복을 추구하면서 많은 것을 이룬 박인비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 지난 6월 말 US여자오픈에서 메이저대회 3연속 우승이란 기록을 세운 뒤 부쩍 압박감을 크게 느꼈다. 박인비는 “US여자오픈 우승 이후 쭉 힘들었다”며 “전반기에 6승을 하면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시즌이었는데 주위에선 더 많은 것을 바라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라고 부담감을 안겨줬다”고 했다. 그는 “많은 것을 이루고 행복했는데 원래 생각하지도 않았던 그랜드슬램(메이저대회 4승)이란 목표가 갑자기 생기니 행복이 중간에 갈 길을 잠시 잃기도 했다”고 되돌아봤다.
결국 시간이 약이었다. 박인비는 “힘든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관심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며 “욕심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니 결국 마지막에 좋은 결과가 돌아왔다”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스포츠외교 공부하고 싶어”
올 시즌을 마친 박인비는 다음달 2일 대만으로 출국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2014시즌 개막전으로 치러지는 스윙잉스커츠대회에 출전한다. 연말을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고 호주에서 동계 전지훈련을 진행할 예정이다. 박인비는 “체력, 기술, 멘탈 등 모든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데 체력 훈련과 퍼팅 실력 보완에 집중할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박인비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올 시즌 여세를 이어서 내년엔 브리티시여자오픈이나 에비앙챔피언십 중 하나를 우승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해보고 싶습니다. 장기적으로는 태극마크를 달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어요. 골프 선수로서 대회에 나가 경쟁하는 것 자체가 스포츠를 통해 나라를 알리는 거죠. 스포츠외교를 공부해 기회가 된다면 먼 훗날 스포츠외교관으로서 역량을 발휘했으면 합니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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