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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과 날줄] 저녁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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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생활에 치여 남루해진 일상
더 사람답고, 더 빛나는 삶을 위해 자기 안 자기의 열망에 귀기울이길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한 은행의 인력관리 본부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했다. 과장이나 부장 직급에 있는 은행원들을 위한 1박2일 사내 연수회인데, 무뎌졌을 은행원들의 감성을 열 수 있는 좋은 강연을 부탁했다. 가을의 주말 저녁, 바다가 보이는 서해안의 연수회장에서 은행원들과 함께 시를 읽었다.

터키의 서정시인이 감옥에서 쓴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는 인생이 여행이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여정이라고 말한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고, 가장 빛나는 별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다. 짝, 짝, 짝. 강연장에 박수가 터지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른 누군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바로 우리 본성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시가 가리키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시는 항상 불멸의 춤, 빛나는 별, 최고의 날들을 노래한다. 시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모든 금지를 금지하라고 외친다.

시인들은 쓸모없는 질문을 던진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보라.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됐고 거북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딜까. 새들은 어디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시는 질문을 던지고, ‘시대의 역설’을 폭로한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그들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었지만/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시가 에두르지 않고 어두운 역설을 날카롭게 드러내자 그들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더 이상 박수는 나오지 않았다. 왜 날이 갈수록 삶이 팍팍해질까요?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연이 끝나고 시를 썼다. 시를 쓴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명민한 시를 써냈다. 한 사람씩 제가 쓴 시를 낭독하고, 그 시를 쓰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시가 낭독되자 웃음과 환호성, 박수가 터졌다. 맞아, 맞아! 바로 내 얘기야!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이내 가라앉았다. 누군가 메마른 삶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여기저기서 흐느꼈다. 그들 내면의 상처들이 시를 통해 드러나자 당황하고, 침울해 하더니, 나중엔 저마다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눈치였다. 한 집안의 가장, 남편, 아들로 산 이들, 누구보다 성실하게 제 삶을 꾸려온 사람들을 슬프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제 삶을 돌아보고 난 뒤 제 삶이 멍과 상처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고액 연봉을 받는 직장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늘 업무는 넘쳐나고, 퇴근시간은 늦었다. 종일 과중한 업무를 짊어지고 허덕대느라 불행하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저녁이 없는 삶’은 나, 가족, 행복에 등을 돌리고 그것에서 멀어져가는 시작점이다. 그것은 고갈의 시작이고, 불행의 전부였다.

어디 ‘저녁’을 빼앗긴 게 은행원들뿐이랴! 성장 중독에 빠지고, 생산의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대신하는 현대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한가롭고 느긋한 ‘저녁’을 빼앗겼다. 많이 가져도 만족이 없고, 삶은 남루해졌다. 짐을 짊어진 낙타처럼 뼈가 휘도록 일을 해도 행복하지 않다. ‘저녁’을 빼앗기고 우리는 자아를 잃고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녁이 있는 삶’을 빼앗아 간 것은 누구일까.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는 ‘기러기’에서 이렇게 권유한다. ‘당신이 꼭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참회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 사막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다만 당신 육체 안에 있는 그 연약한 동물이 원하는 것을/할 수 있게 하라’. 원하지 않는 운명을, 혹은 조작된 미래를 강요당하는 삶이 ‘저녁이 없는 삶’이라면, ‘저녁이 있는 삶’은 내 안의 연약한 동물이 열망하는 것을 하며 사는 삶이다. 그것이 더 사람답고 더 빛나는 삶이요, 시적인 삶이다. 그것은 우리의 당연한 누려야 할 권리다.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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