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신기술이 농업에 투입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면 뭣합니까. 농민들 반대 앞에선 다 무용지물입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농업법인에 대한 출자규제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이렇게 푸념했다. 한국은 이미 규제를 풀어 일본보다 발 빠르게 기업의 농업 참여와 외부자본 수혈을 허용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 현행법상 한국에선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비농업인)도 농업회사법인에 총 출자액의 90%까지 내놓을 수 있다. 일본의 비농업인 출자 기준(25%)보다 훨씬 완화된 기준이다. 법상으로는 대기업이 농업에 진출하는 데 별다른 제약이 없는 셈이다.
한국의 규제완화는 농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선 외부자본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결과다. 기업의 자본과 기술, 경영능력이 도입돼야만 한국 농업이 농산물 개방의 파고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대다수 선진국에선 기업들이 영세하고 고령화된 농업을 재조직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실리콘밸리 첨단기업들이 살리나스 농업단지에 진출하고 있고, 중국은 PC업체 레노버홀딩스까지 딸기 농사에 투자하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실현 가능성이다. 한국은 농민단체 반발이 워낙 심해 농업에 대한 외부자본 수혈이 꽉 막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농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토마토 수출 사업을 포기한 동부팜한농이다. 기가 막히다 못해 허무하다는 것이 해당 기업의 속내다.
농식품부도 이런 상황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동부팜한농 논란 이후인 지난 7월 ‘기업의 농업 참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담기지 않아 오히려 ‘보여주기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몇 차례 공청회를 열었지만 눈에 띄는 대책도 나오지 않았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농민들의 반발이 심해 함부로 나서기가 조심스럽다”고 했다. 대기업과 농업계의 상생방안을 고민해야 할 정부마저 농민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농업의 6차산업화’를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식품산업의 고부가가치가 농업으로도 이전될 수 있도록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도 기업도 눈치를 봐야 하는 ‘농민정서법’이 발목을 잡고 있는 한 과제 달성은 요원해 보인다.
고은이 경제부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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