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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신용호의 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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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스펙(spec)은 영어 specification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원래 제품의 사양 치수 성능 등을 담은 명세서나 설명서를 뜻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는 의미가 바뀌었다. 구직자의 학력, 학점, 공인 영어점수, 각종 자격증 보유 정도 등을 나타내는 말이 됐다.

하도 많이 쓰이다 보니 2004년부터는 아예 국립국어원 신조어로 등록됐다. 스펙에서 파생된 말도 다양하다. ‘스펙 리셋’은 편입학 등으로 학력과 학벌을 바꾼다는 뜻이다. ‘페이 스펙’은 얼굴을 뜻하는 페이스와 스펙의 합성어. 얼굴도 그 사람의 중요한 스펙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스펙 푸어’는 정작 많은 스펙을 쌓았지만 취업이 되지 않아 빈곤층으로 빠져드는 취업 준비생을 일컫는다. 원래 물건에만 쓰이던 스펙이 한국에서는 사람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돼버린 셈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 명세서와 같은 스펙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고 하니 기분 좋게 들리지 않는 건 당연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불고 있는 ‘스펙 초월’ 채용 바람도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올해 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공기업과 공공기관 채용시 전형 서류에 학력을 기재하지 않는 ‘학력 블라인드 전형’을 도입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바람에 일조했다. 기획재정부는 내년 상반기부터 295개 공기업 공공기관 사원 채용시 서류 전형을 아예 없애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한다. 대기업 금융회사들이 채용에서 잇따라 스펙 초월 전형을 택하고 있는 것도 이런 사회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처럼 스펙을 무조건 배제하는 게 능사인지는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스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무래도 학력이다. 학력은 지원자가 어느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준비가 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기초적인 지표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사람을 선발한다는 건 여간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다. 스토리텔링 오디션 면접 등으로 뽑는다지만 수년의 기록이 아닌 몇 분간의 대면으로 적성과 능력을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판단착오의 가능성을 높인다. 배우를 뽑는 오디션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고질적인 학력 지상주의의 폐해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올해 10주기를 맞은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처럼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기업을 일군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최종 학력란에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다고 썼던 것으로 유명하다. 본격적인 채용시즌이다. 구직자들이 스펙도 모자라 이젠 오디션 개인기까지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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