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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미술산책] 멀어질수록 물체 흐리게 보이는 현상 재현…선원근법 밀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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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5) 원근법의 진화, 대기원근법



르네상스시대 최고의 예술가로 통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그는 브루넬레스키가 창안한 선(線) 원근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남긴 작품들을 보면 실내의 광경을 그린 ‘최후의 만찬’을 제외하면 선 원근법을 구사한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마사치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사실적인 원근감이 느껴진다.

그의 후기작(조수가 그렸다는 설도 있다)으로 추정되는 ‘얀와인더의 마돈나’는 성모 마리아가 얀와인더(yarnwinder실 감는 기구)를 든 아기 예수를 무릎 위에 앉힌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배경의 묘사방식이다. 여기서 선 원근법을 암시하는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당대의 어떤 작품들보다도 사실적인 원근감이 구현돼 있다. 다빈치는 당대로서는 최첨단의 테크닉을 사용했다. 바로 ‘대기 원근법’이다.

일단 이 그림을 보면 앞부분의 성모자 주변의 바위는 짙은 갈색 톤으로 묘사됐다. 그런데 저만치 뒤로 갈수록 배경은 희미해진다. 뒤편의 시내와 다리를 지나면 갈색의 대지는 어느새 푸른 색 톤으로 변하고 그 뒤 날카로운 봉우리의 산맥은 뒤로 갈수록 흐릿해진다. 맨 뒤쪽의 산들은 희미한 자취만을 남기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마치 푸른 하늘에 녹아든 것처럼 말이다. 놀랍게도 이런 새로운 원근감의 연출 방식은 평면 위에 마사치오의 작품보다 훨씬 더 정교한 환영의 세계를 창조했다.

대기속 미립자가 겹겹이 쌓여 시야 방해 <</span> 마사치오가 구사한 원근법이 산수와 기하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비해 다빈치의 원근법은 빛의 산란작용에 근거를 둔 것이다. 대기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립자가 떠돌아다니는데 이것들이 빛을 반사하여 그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게 된다. 멀어질수록 형체가 흐릿해지는 것은 미립자들이 겹겹이 쌓여 두터운 막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다빈치 자신도 “색채가 흐려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거리에 비례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런 과학적 배경을 꿰뚫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

선 원근법이 수학이라는 하나의 인위적 약속에 바탕을 두고 있는 데 비해 대기 원근법은 인간이 발을 딛고 있는 공간에서 인간의 눈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실제 현상에 기반을 둔 만큼 보다 완벽하게 3차원적 공간을 재현하는 기법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기원근법은 다빈치가 독자적으로 창안해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로마인들은 2000여년 전에 이미 대기원근법을 시도했다. 중세에 기독교 지도부가 사실적인 회화의 제작을 금지하면서 맥이 끊겼다가 15세기 초 플랑드르(오늘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화가들에 의해 재발견됐다. 1420년께 그려진 반 에이크 형제의 ‘십자가의 책형’을 보면 예수가 처형된 골고다 언덕 뒤편으로 대기 원근법이 실감나게 구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대기원근법을 다빈치의 트레이드마크로 여기는 것일까. 한술 더 떠 대기원근법을 다빈치가 창안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반 에이크 형제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멘붕’에 빠질 게 틀림없다. 이런 오해가 일어나게 된 데는 다빈치의 유명세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다빈치는 비록 피렌체에서는 미켈란젤로 같은 후배에게 밀렸지만 전 유럽의 군주들이 탐을 낸 인재 중의 인재였다. 게다가 그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밀라노, 로마, 프랑스 앙부아즈 등 활동의 근거지를 계속해서 옮겼다. 그래서 그가 시도한 새로운 회화 기법들은 그의 발길을 따라 곳곳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누가 발명했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에 의해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됐느냐도 중요한 것이다. 플랑드르 화가들이 발명했지만 이것이 전 유럽으로 확산된 데는 다빈치라는 대가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마치 스타가 연출한 패션이 하나의 유행으로 발전되듯 말이다.

이제 선 원근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유행이 되고 말았다. 다빈치 이후의 화가들은 저마다 대기원근법으로 화폭 속에 가상현실을 구축했다. 그러나 회화가 과학에 의존할수록 감성이 발 디딜 곳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화가들은 어떻게 자신만의 개성을 발현할 것인가.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에게 남겨진 영원한 숙제다.

정석범 기자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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