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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지(智) 혹은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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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변한 진한 마한의 삼한(三韓)은 80여개의 부족 국가들이 모여 만든 연맹체였다. 이들 국가는 대부분 부족회의에서 대소사를 결정했으며 이 회의의 장을 신지(臣智)나 읍차(邑借) 등으로 불렀다. 1만호 이상의 큰 부족은 신지가, 작은 부족은 읍차가 다스렸다. 위당 정인보(1893~1950)는 신(臣)은 읍 이상의 광대한 영역을 표시하던 명칭이었으며 지(智)는 순수 우리말 ‘치’에서 음차한 것으로 우두머리를 뜻한다고 했다. 순수 고구려말이라는 설도 있다. 백제 온조왕도 당시 발음으로는 온치라 불렸다고 한다.

진한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도 사로국 6촌 촌장들이 모인 화백회의에서 부족의 일을 결정했다. 이런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역시 지(智)라는 명칭을 붙였다. 신라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인 진흥왕순수비 등 비석들의 금석문에서도 이 시대 명칭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라인의 이름은 2~4자인데 인명 속에 존칭 접미사는 항상 포함돼 있고 특히 이들 중 50%에 지(智)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이사부나 거칠부 등 신라의 명재상 이름 뒤에도 ‘지’자는 항상 붙어다닌다. 지 혹은 치는 이른바 극존칭 접미사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지’자는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고 강력한 왕권국가로 발돋움한 법흥왕(재위 514~540) 이후 흔적이 사라진다. 왕의 이름에 대왕이나 태왕만 붙이고 귀족들은 관등성명만 기록됐다. 대신 치는 일반인들의 언어 생활에 녹아 들어갔다. 15세기부터 벼슬아치나 구실아치(아전) 등 관리들을 지칭하는 단어에 치가 붙었다. 갖바치(가죽장인), 옥바치(옥(玉)장인), 풀무아치(대장장이) 등 장인들에게도 이런 치를 넣어 불렀다. 이치 그치 저치 등 사람을 부를 때도 썼고 점바치 양아치 동냥치 장사치 등 사람을 얕잡아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인 금관총에서 나온 둥근자루큰칼(환두대도)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글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1921년 일제에의해 발굴된 이 무덤에 대한 조사 보존처리작업을 진행하면서 밝혀졌다고 한다.

글자에서 왕을 뜻하는 마립간이나 대왕 등의 단어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과 금관 등 위세품이 함께 출토된 것을 볼 때 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지(智)자 호칭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권력자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라의 극존칭어가 지금은 비칭처럼 쓰이고 있는 게 언어의 전락사인 것인지.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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