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오피스
친구처럼…옆집 아저씨 처럼… 박용만 두산 회장의 친화경영
지난해 12월 서울 신문로의 한 카페에서 열린 두산그룹 출입기자 송년회. 폭설로 교통이 마비됐던 그날 저녁,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기자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 연세대 경영학부생을 상대로 한 강의를 마치고 달려왔다고 했다.
박 회장의 등장으로 송년회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스탠딩 뷔페로 진행된 행사에서 박 회장은 출입기자들은 물론 두산 임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얼마 전 다녀왔다는 미얀마 출장에서 보고 느낀 점을 가감 없이 털어놓다가도 주위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면 놀랄 만큼 진지해졌다. ‘소통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드러난 자리였다.
‘소탈함’은 박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다. 오너 경영자인 데다 경영 능력을 갖춘 덕분에 박 회장의 소탈함은 오히려 강한 리더십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소탈+친근’의 리더십
박 회장은 취임 한 달째인 작년 5월 그룹 임원들을 제주도로 불러 2박3일간 워크숍을 가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Is it the Doosan Way?(과연 이것이 두산다운 방식인가?)’라는 문구가 새겨진 모래시계를 모든 임원들에게 선물했다. 그러고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면 모래가 흘러 내려가는 3분 동안만이라도 두산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맞는지를 고민해 달라”고 주문했다.
소탈한 박 회장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회사 가기 싫다. 출근시간 지났는데 이불 속에서”라고 트위터에 글을 올린 신입 직원에게 그가 “내 차 보내줄까? ㅋㅋㅋ”라고 댓글을 단 것은 한동안 화제가 됐다.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대기업 회장은 네티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광고 카피로 올해의 광고 카피라이터상까지 받은 그는 직원들을 존중한다는 마음을 직접 드러내려고 애쓰는 경영자다. 지난 3월 서울 장충단로 두산타워에서 임직원과 가족들을 초청해 연 ‘박용만과 함께하는 봄을 맞는 저녁’ 콘서트에선 사회를 직접 봤다. 그 자리에서 박 회장은 “하루의 70% 이상을 함께 보내는 임직원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고 임직원 가족들 역시 모두 두산 가족”이라고 했다.
두산이 기존 인사고과와 서열화 방식을 없애고 개인별 역량 육성에 초점을 둔 파격적인 인사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사람 중시의 경영을 실천하려는 취지였다. 내부적으로 상무, 전무, 부사장 등 직급을 없앤 두산은 이달 초 점수에 따라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는 인사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진퇴의 순간을 아는 경영자
두산의 주력은 ‘딱딱한’ 중공업이다. 박 회장은 딱딱한 비즈니스를 부드럽게 푸는 최선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에 고객 배려에 남다른 공을 들이고 있다.
두산은 2010년부터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리는 4대 메이저 골프대회의 하나인 ‘디 오픈 챔피언십(브리티시 오픈)’을 후원하고 있다. 이 대회에 유럽과 중동 등의 고객사 관계자들을 초청해왔다.
박 회장은 (주)두산 회장이던 2011년 7월 초청 고객이 묵을 호텔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워낙 유명한 골프대회이다 보니 숙소가 동난 것이다. 아연 긴장한 박 회장은 “크루즈선 한 대를 빌려라”고 지시했다. 대회가 열리는 로열 세인트 조지스 골프장이 도버 해협과 가깝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크루즈선을 숙소로 이용한 고객들은 두산의 배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두산 임직원은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상대하는 소비재와 달리 중공업에서는 구매를 결정하는 소수 고객에 집중해야 한다”는 박 회장의 영업지침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박 회장은 1982년 두산건설 평사원으로 시작했다. 20년 넘게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강력한 구조조정과 인수합병(M&A)으로 두산을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 등 글로벌 인프라 지원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게 그였다.
박 회장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에 이어 2007년 미국 건설장비 업체 밥캣(현 두산인프라코어인터내셔널) 인수를 주도했다.
줄곧 사업을 확장해온 박 회장은 최근 들어 ‘내실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현 상황을 위기로 진단하고 체질 개선의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난관에 봉착하면 피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경영난을 겪고 있는 두산건설에 1조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취지에서다. 소탈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는 과감한 박 회장의 리더십이 보수적인 두산 분위기를 바꿔가고 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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