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국장대우 haky@hankyung.com
편집국 국장대우
1964년 6월, 장기영 당시 경제부총리는 ‘침수방지대책위원회’ 첫 회의를 소집했다. 경제기획원 재무부 내무부 상공부 농림부 등의 국장들이 위원으로 임명된 회의였다. 다른 일정이 생긴 내무부 치안국장은 ‘침수방지’라는 위원회 명칭을 말 그대로 이해하고는 소방과장을 대리참석시켰다가 혼쭐이 났다.
자연재해로 인한 도로와 주택 등의 침수 방지대책을 논의하는 회의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밀수와 부정 외제품 거래, 암달러 거래 따위의 나쁜 물이 우리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게(침수 방지) 한다’는 것이 위원회 발족 취지였던 것이다. 재기(才氣)가 넘쳤던 장 부총리의 엉뚱한 작명(作名)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패러디 대상이 된 '경제민주화'
1960년대는 만성적인 외환 및 물자 부족 상태에서 천정부지로 치솟던 물가와 정부가 사투(死鬪)를 벌이던 시기였다. ‘침수방지’ 소극(笑劇)은 그 시절 정책당국의 치열했던 고뇌를 보여주는 한 토막 풍경이랄 수 있겠지만, 요즘 정치판이 요령부득의 이름을 붙여 쏟아내고 있는 정치 슬로건들은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 가슴이 답답하다.
인기 걸그룹 멤버의 ‘민주화’ 패러디가 그런 예다.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는 말에 정치권은 발끈했고, 당사자는 ‘무(無)개념 연예인’으로 공격받는 곤욕을 치렀다. 집권 새누리당이 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용어를 선점해 재미를 본 ‘경제민주화’를 감히 희화화했으니, 혼쭐나는 게 마땅하다고 해야 할까.
‘1주(株)1표(票)’의 시장경제시스템에 ‘1인1표’의 정치개념인 ‘민주화’를 갖다 붙여 공약을 쏟아낸 결과가 어떤지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몇몇 기업인들의 일탈과 권력자들의 특권 향유가 우리 사회의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면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고, 불법·탈법행위를 엄단해 ‘창의적이고 성실한 노력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본질을 ‘경제민주화’라는 정치구호로 호도한 결과는 우리 사회를 ‘가진 자’와 ‘빼앗긴 자’의 대립구도로 몰아넣었고, 졸지에 ‘민주화의 공적(公敵)’이 된 기업들이 한껏 위축되자 집권세력은 뒷감당에 골치를 앓고 있다.
광주정신'이 '을 지키기'라고?
‘경제민주화’ 주도권을 빼앗겨 선거에서 패배하고, 당의 사분오열로 만신창이가 된 민주당이 돌파구로 빼어든 ‘을(乙) 지키기’는 더욱 고약하다. 민주당은 ‘을 지킴이’를 자임하며 선포한 지난달 16일의 ‘광주선언’에서 “광주정신이 을의 정신이며…우리 사회의 모든 을들을 만민공동회의 이름으로 엮어낼 것”이라며 비장함을 과시했다. 1898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맞서 개최됐던 만민공동회까지 끄집어내 ‘이 땅의 모든 을들’을 결속시키고 보호하겠다는 얘긴데, 정작 ‘을’에 대한 딱부러진 정의(定義)는 없으니 희한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랫동안 우월적 지위를 강화해온 갑과, 이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한 을로 편가르기 돼 왔다”(김한길 대표)거나, “을에 대한 갑의 수탈적, 약탈적, 비상식적인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이익구조를 바로잡자는 것”(전병헌 원내대표)이라는 연설에서 이 당(黨)의 작년 선거판 구호였던 ‘1% 대 99%’를 달리 포장한 것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막장으로 치닫는 정치판의 무책임한 왜곡과 가치 훼절 경쟁을 지켜보자니 억장이 무너진다. 성공한 자에 대한 질투와 무조건적인 증오를 ‘시대정신’으로 오염시키고 있는 정치 선동을 두고 봐야만 하는가.
편집국 국장대우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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