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공급경제학의 선구자 장 바티스트 세이
프랑스 리옹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장 바티스트 세이(Jean-Baptiste Say)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사업가가 되려고 했다. 영국 런던에서 2년간 경영실습까지 받은 뒤 파리로 돌아와 한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보험회사 사장은 프랑스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치가이자 자본가였다. 세이는 그가 우연히 소개해준 애덤 스미스의《국부론》을 읽고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세이가 평생의 과제로 여겼던 것은 정부의 통제로부터 시장을 풀어놓는 것이 불평등을 제거하고 빈곤도 줄여 모든 사람이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런 과제의 해법은 선구적이었다. 재화의 가치는 노동 투입량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주관적 효용평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부터가 새로웠다. 시장에서 돈벌이를 하려면 소비자 욕구 충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기업가 역할에 대한 세이의 인식도 독특하다. 기업가는 소비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기업의 생산 활동을 통솔하는 중요한 의사결정자로서 성장하는 경제의 요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인간욕구를 충족하는 상품 생산을 위해 생산요소를 조합하는 사람은 노동자, 자본가, 지주가 아니라 바로 기업가라는 뜻이다.
세이의 경제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세이의 법칙’으로 알려진 시장원리다. 주목할 부분은 그가 이를 제시한 배경이다. 일반적으로 사업이 잘 안 되면 소비와 같은 수요 부족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뿌리 깊은 인간의 직관에 따른 것으로 과소소비설로 불린다. 생산을 위해서는 먼저 소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이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이의 법칙을 제시했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말 대신에 농부가 곡물을 재배해 팔면(공급) 그 수입으로 아이들 옷도, 비디오도 구매할 수 있듯이(수요) 어느 한 재화의 공급은 ‘그’ 재화의 수요가 아니라 ‘다른’ 재화의 수요를 창출한다고 지적했다. 소비를 위해서는 먼저 생산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풍년이 들면 농부가 새로운 농기계를 사고 부부가 여행도 할 수 있지만 흉년이 들면 그런 상품을 수요할 수 없듯이 산출이 많아야 소비지출도 늘어난다. 그래서 경제성장이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 세이의 해석이다.
소비보다 생산이 먼저라는 것은 경기변동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경기 하강이 시작되면 소비보다 먼저 생산이 줄어든다. 경기회복기에 접어들면 생산이 먼저 증가하고 소비가 뒤따른다.
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사고파는 상품들은 1960~7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통화나 정부지출을 늘려서도, 소비가 늘어나서도 아니다. 이 같은 소비능력은 오로지 생산에서 나왔다는 게 세이의 통찰이다. 그래서 그가 주목한 했던 것은 경제성장의 열쇠다. 경제성장을 위해선 자본 축적과 생산성 향상, 신상품 또는 신시장 개척 등 새로운 지식 창출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기업가를 중시한 이유도 수요를 창출할 경제성장 때문이었다. 기업가가 새롭고 질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면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그래서 소비도 증가한다.
따라서 소비를 진작하는 것은 경제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세이는 강조한다. 소비를 위한 수단 마련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생산만이 수요를 위한 자금을 조달한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그래서 그는 생산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좋은 정부이고 소비를 조장하는 것은 나쁜 정부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번영을 위해 세이가 중시한 것은 우선 보호무역과 특권, 규제의 철폐였다. 해군을 양성하는 대신에 자유무역을 촉진시키는 것이 더 큰 이득을 가져다주고 유럽 평화의 지름길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성장을 위한 정부재정도 세이에게 큰 관심거리다. 정부지출 증대를 통한 생산 증대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철석같은 믿음이었다. 고용 창출도 유효수요를 늘리기보다는 새로운 기술과 산업의 유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정부부채의 증가도 우려했다. 민간 자본의 형성을 방해할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세이의 조세에 대한 인식도 선구적이다. 조세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강제적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대의제가 과세의 강제성을 완화하지 못한다고 한다. 시민들이 과세에 동의했다고 해도 실질적인 동의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세를 회피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과세는 납세자에 대해 착취적 성격이라는 그의 경고도 이채롭다.
세금을 많이 내 정부지출이 많아지면 부유해진다는 믿음은 터무니없다고 세이는 설명했다. 조세 부담이 커지면 자본축적을 방해해 생산이 정체되고 일할 의욕도 위축돼서다. 그는 과도한 조세는 국제경쟁력도 약화시킨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번영을 위해 세율이 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율이 낮으면 소득이 늘어 세금이 오히려 증가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수요가 부족해 번영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간섭과 과세가 소비와 경제번영을 위축시킨다는 것이 세이 사상의 핵심이다. 이처럼 세이는 효용가치론, 기업가 이론, 시장이론 등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내 공급 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공급경제학의 이론적·철학적 기초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불모지였던 자유주의 재정학을 개척한 공로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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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거노믹스 세율 인하의 토대
세이 사상의 힘
세이의 경제사상은 나폴레옹 전쟁 뒤 프랑스 사회가 곤경에 처해 있던 시기에 등장했다. 보호주의, 과도한 조세, 시장에 대한 각종 규제 등 간섭주의가 득세했다. 사회주의 이념도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해 그같은 규제와 간섭을 옹호했다.
세이는 이런 시기에 자유무역과 자유시장만이 프랑스의 빈곤과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갈파했다. 정부가 할 일은 규제를 비롯, 정부 지출과 조세 부담을 줄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이는 젊었을 때부터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모임을 이끌면서 자유주의 철학 관련 계간지를 발간했다. 글과 강연 등으로 자유사상을 설파했다. 그러나 정부정책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세이는 그의 저서《정치경제학》이 인기를 끌면서 자유주의 사상이 취약했던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도 감격했던 것이 세이의 저서였다. 미국의 정치권이 간섭주의를 옹호하는 분위기가 감돌자 제퍼슨은 세이의 책 출판을 주선했다. 세이의 사상은 19세기 초반 내내 미국 자유주의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한동안 세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1930년대 세상에 다시 등장했다. 그를 등장시킨 인물은 케인스였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세이의 법칙’을 이용했다. 케인스는 세이의 법칙을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기 때문에 재화는 생산하기만 하면 저절로 구매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이론으로는 실업도, 경기변동도 설명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케인스의 그런 해석은 옳지 않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1980년대 규제 철폐와 조세 삭감을 핵심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에 영향을 미친 공급경제학의 뿌리는 세이의 사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레이건 행정부가 77%의 고소득층 한계세율을 28%로 삭감할 때 재정적자 증가를 두려워했다. 이 두려움을 없애고 조세 삭감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이 ‘감세가 소득 증대로 이어져 전체 세금은 늘어나게 된다’는 논리로 이는 원래 세이의 조세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이의 생각은 통계적으로 입증됐다. 부유층에 대한 조세삭감 이전 소득계층 상위 1% 조세 부담은 17.6%(총 조세부담 대비)에서 1988년 27%로, 상위 5%의 조세부담 비중은 35.1%에서 1988년 45%로 높아졌다.
민경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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