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의 참선 수행이나 천주교의 피정은 종종 묵언을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실존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을 상기해본다면 묵언조차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이데거의 말은 ‘인간의 사유 방식은 스스로 사용하는 언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언어체계는 그만큼 인간의 존재, 사회의 구성에서 절대적이다.
본질에 꼭 들어맞는 적확한 말, 특정 상황에 어울리는 예리한 개념어를 쓰는 것은 사회가 고도화되고 지식 수준이 높아질수록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문호 플로베르가 이미 167년 전에 언급한 ‘일물일어(一物一語)설’은 지금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일물일어는 세상의 어떤 사물이든지 자신을 표현할 오직 하나만의 단어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관념이든 형상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어의 오용과 남용, 악용이 심각한 현대사회를 비판한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명백한 요금인상인데 조정, 상향조정, 현실화라며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표현하는 관료들의 행정용어도 적지 않다. 요즘 범람 상태가 된 ‘경제 민주화’란 말만 해도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민주라는 미명 아래 폭력을 정당화는 일이 부지기수다. 좋은 말은 다 가져다 깃발로 내거는 정치구호란 게 원래가 그렇다. 협상결렬이란 말 대신 ‘우리는 상호 이견이 있다는 사실에 합의했다’고 하는 외교용어도 때로는 진실과 실체를 가리는 데 단단히 한몫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란 기치로 역사왜곡을 가려 우리를 당황케 했는데 지금 일본은 스스로 사과까지 한 일을 다시 부인하는 궤변을 연일 내놓으면서 우리를 아연실색하도록 만든다. 일본의 ‘우경화(右傾化)’라는 말도 실은 틀린 말이다. 수구라는 말이라면 몰라도 이를 우파와 연결해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역사왜곡을 넘어 역사부정에 나선 일본의 아베 정부를 지칭한다면 ‘저급 민족주의적 경향성’ 정도가 더 맞을 것이다. 남들 흉만 볼 일도 아니다. 우파, 좌파를 그대로 보수, 진보로 부르는 것도 정명에서 벗어났다. 경제쪽 용어도 마찬가지다. 부정확한 말, 정치색채를 덧씌운 과도한 용어가 한둘이 아니다.
엊그제 한국경제연구원이 토론회까지 열어 경제용어를 바로 쓰자고 나서 주목된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자본주의’ ‘재벌’ 같은 투쟁적, 갈등유발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말 대신 ‘시장경제’ ‘대기업집단’으로 하자는 것이다. 번역상 오류인 자유방임주의는 불간섭주의라 하는 게 정확한 개념어라는 지적도 있었다. 차제에 우리 언어에 깃든 과도한 정치색부터 한번 걸러보자. ‘언어의 인플레’를 잡고, 언어적 이념공세를 조금은 순화시켜 보자는 얘기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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