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잡앤조이=박해나 기자] 현실이 너무 퍽퍽해 도망치고 싶은 순간,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붙잡는 것은 다음 달의 내가 갚아야 할 카드 값, 그리고 무직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모든 근심 걱정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덜컥 용기를 내 떠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퇴사 후 718일간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온 두 여자의 이야기.
△ (왼쪽부터) '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의 김연우, 위경은 씨 (사진=김기남 기자)
‘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는 다양한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 팀이다. 김연우(필명 김멋지·34), 위경은(필명 위선임·33) 씨가 운영 중인 블로그 이름이기도 하다. 무계획의 세계 일주를 떠나기 전 이 엄청난 인생의 이벤트를 기록하고자 블로그를 개설했는데 그것이 인기를 끌며 자연스레 ‘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라는 팀으로 불리게 됐다. “둘이 새벽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마치 야반도주를 하는 느낌이더라고요. 그때 기억이 나쁘지 않아 블로그 이름을 지을 때 ‘야반도주’를 떠올렸어요. 그리고 블로그를 만든 때가 서른 살이었고, 결혼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 ‘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라는 이름이 나오게 됐죠.”(위경은) 10년 우정의 대학 동기, 서른이 되면 함께 떠나자
김연우, 위경은 씨는 숙명여대 의상학과 동기다. 스무 살에 만나 10년 이상의 구수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계획적이지 않은 성격과 개그코드가 잘 맞아 대학시절 몇 번의 해외여행을 함께했고, 만족스러운 여행 뒤 ‘서른이 되기 전 함께 세계여행을 하자’는 다짐도 했다. 서른 즈음에는 두둑이 모은 돈으로 인생을 즐길 여유가 있을 거란 착각에서 비롯된 미래 설계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회사생활에 찌들어 점차 삶의 활력을 잃었고, 초심을 유지하는 것은 구멍이라도 난 듯 처음 그대로인 통장 잔고뿐이었다. “둘 다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생활을 하며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갔어요.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죠. 순간순간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세계여행은 막연한 꿈이었지 현실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죠.”(김연우)△ 나미비아 여행 중 (사진=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 제공)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위 씨의 건강 문제였다. 위 씨는 회사생활을 하며 받은 스트레스로 몸 이곳저곳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병원을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됐고 나중에는 수술까지 받아야 할 만큼 약해졌다. 퇴사 후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결정이 쉽지 않았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면 먹고 살 일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때 위 씨의 남자친구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퇴사’였기 때문이다. 위 씨는 고민 끝에 이별을 택했다. “‘취집’도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죠. 퇴사 후 창업을 할까, 대학원을 갈까, 이직을 할까 여러 가지를 고민을 했어요. 그러던 중 연우와 대학시절 얘기했던 세계여행이 생각 난 거죠. 다른 모든 것은 썩 내키지 않았는데 세계여행은 마음이 동하더라고요. 혹시나 해서 연우에게 제안을 했는데 고민 없이 바로 승낙을 했어요.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제가 도화선을 당겼다더라고요.”(위경은)△ 여행을 떠나던 날.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으로 여행 준비 완료
(사진=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 제공)무계획의 세계여행, 딸기농장에서 울며 여행경비 벌어
대책도 계획도 없는 서른 살의 세계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워낙에 계획성이 없는 성격이라 둘은 정확한 여행 일정도, 루트도 정하지 않았다. 막연히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을 하자’는 큰 그림만 그렸을 뿐이다. 여행의 준비도 남달랐다. 여행지에서 악기 하나쯤은 다루고 싶어 생전 쳐 본적 없는 우쿨렐레를 구입해 유튜브로 연습했다. 여행의 편의성을 위해 레이저 제모를 하고 머리를 짧게 잘라 파마도 했다. 그걸로 이들의 여행 준비는 끝. 영어 공부나 현지 정보 알아보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2014년 10월 6일에 떠나 2016년 9월 22일에 돌아왔어요. 2년을 딱 15일 앞두고 여행을 마친 거죠. 2년 동안 24개국을 여행했습니다. 보통 2년에 40개국 이상 여행하는 것에 비하면 적은 숫자죠. 한곳에서 오래 머무르는 편이었고, 9개월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기도 했거든요.”(김연우) △
인도의 히말라야 소금호수 판공초 (사진=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 제공)계획이 없는 것이 이들의 계획인지라 여행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출국하며 정한 것이라고는 도착지가 스페인이라는 것뿐이었다. 긴 비행 끝에 스페인에 도착해서는 숙소가 없어 공항 노숙을 했다. 매일 숙소를 찾아 짐을 짊어지고 이동을 해야 해 여행 초반에는 숙소를 옮긴 기억밖에 없을 정도다. 인도에서는 위 씨의 맹장이 터져 급작스럽게 수술도 받았다. 여행을 시작하고 9개월이 지나서는 경비를 모두 탕진해 호주 딸기농장에 취업을 했다. 하루 종일 딸기를 포장하는 일만 9개월 동안 반복했다. “시골 마을에서 딸기 포장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 허허벌판에 숙소하나 있었거든요. 창문 밖으로 캥거루가 뛰어놀고 소가 풀을 뜯는 풍경이 일상이었죠. 처음 며칠이나 좋지 9개월 동안 그렇게 지내려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저는 단순노동을 반복하는 게 힘들어 울고 경은이는 노래방에 가고 싶다며 울었죠.”(김연우) △ 모로코의 쉐프샤우엔
(사진=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 제공)세계여행 후 달라진 것은 통장 잔고와 마음가짐
2년의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니 여러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통장 잔고. 딸기 포장으로도 여행 경비가 부족해 친구에게 돈을 빌려 사용한 터라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빚 청산에 몰입했다. 빚을 갚고 나니 스스로의 변화도 눈에 들어왔다. ‘좋은 사람 콤플렉스’가 있던 위 씨는 누구한테나 잘 보이고 싶어 부당함을 느껴도 그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위선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그녀는 ‘NO’를 외치는 방법을 터득했다. “라오스 여행 중 한국인 아저씨를 만났어요. 동행하며 술자리를 갖는데 2차, 3차를 계속 요구하더라고요. 거절을 못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술을 계속 마셨는데 나중에는 신체 접촉까지 하며 불쾌하게 했어요. 순간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분을 향해 소리를 질렀죠. 그러고 나니 이 쉬운 걸 왜 여태 못했을 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위경은)김 씨는 귀차니즘이라는 난치병을 극복했다. 늘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계획만 세우고 막상 실천할 때가 되면 귀찮아 미루기만 하던 습관을 고쳤다. “여행을 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선택의 연속이더라고요. 그 선택이 늘 좋은 결과, 재미있는 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겪지 못했을 일들이었죠. 움직여야만 즐거운 일도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제는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일단 하고 보자는 생각을 해요.”(김연우)△ (왼쪽부터) 김연우, 위경은 씨 (사진=김기남 기자)
취업을 하지 않고 먹고 살 방법도 생겼다. 블로그 여행기가 인기를 끌며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그들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다양한 강연에 연사로 초대되고, 기업들과 협업을 통해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라는 책을 출간해 독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이렇다 할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계획 없이 사는 게 계획이랄까요?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다른 세계가 열리면 그때 가서 선택을 하려고 해요. 가정을 꾸리고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생긴다면 결혼도 할 수 있고요. 어떤 것이든 한계를 두고 싶지는 않아요.”(위경은)phn0905@hankyung.com < 저작권자(c) 캠퍼스 잡앤조이, 당사의 허락 없이 본 글과 사진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