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위협 등 지정학 급변에도 안보보다 경제 주권 택해
EU 확장정책도 일단 제동…'수십년만의 순기여국 유치' 기대 불발
르펜·패라지 등 유럽 우익 진영 '환영'…"독립·주권 유지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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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북극 안보를 비롯한 지정학적 혼란 속에 아이슬란드 정부가 유럽연합(EU) 가입 추진에 속도를 냈으나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데는 경제 주권을 둘러싼 리스크를 피하고자 하는 여론이 더 크게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인구 40만명의 작은 나라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5위인 북극권의 부국 아이슬란드는 금융위기를 겪은 뒤 2009년 EU 가입 신청서를 냈다가 남유럽 채무 위기가 벌어진 2013년 가입 협상을 중단했다.
2024년 EU 가입 협상 재추진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범한 중도좌파 사회민주당 정부는 당초 내년 국민투표를 치르려 했으나 러시아발 위협이 계속되고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가 올 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병합 위협에 시달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일정을 앞당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린란드에 관한 구상을 설명할 당시 실수로 아이슬란드의 이름을 네 차례나 언급했다고 AP 통신은 지적했다. 아이슬란드는 자체 군대가 없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 1951년 미국과 체결한 상호 방위 협정에 의존하고 있다.
크리스트룬 프로스타도티르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없을' 기회라며 국민투표를 추진했다. 정부를 비롯한 이번 국민투표 캠페인에서 EU 울타리에 들어가면 아이슬란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국민투표에서 반대 결과가 나오면서 유럽 전역에서 EU를 흔들고 있는 유럽통합 회의론을 가라앉히려던 EU의 바람은 무산됐다.
EU 당국자들이 북극 안보에 관한 관심이 높은 시기에 EU의 전략적 입지를 강화하고 유럽통합과 EU 확장을 둘러싼 회의론을 가라앉힐 수 있는 '긍정적' 사례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결과는 EU에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주요 외신은 짚었다.
블룸버그 통신은 EU가 마지막으로 회원국을 늘린 게 13년 전이고 부국인 아이슬란드가 가입하면 30여 년 만에 '순 공여국'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 운동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EU 회의론자 나이절 패라지 영국개혁당 대표는 이번 개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엑스(X·옛 트위터)에 "아이슬란드가 독립을 지키기로 한 것을 축하한다"고 썼다.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도 "일각에서 더 큰 연방주의와 EU 집행위원회로 주권 이양을 밀어붙이는 때에 이번 투표는 또 다른 유럽, 자유로운 주권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의 이익에 협력하는 유럽이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한다"고 적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이번 국민투표 기간 안보보다는 경제와 무역, 특히 어업권과 높은 금리, 생활 물가가 토론의 쟁점이 됐다.
아이슬란드 수출의 약 3분의 2는 EU로 향하며 미국행은 9%에 그친다.
또한 아이슬란드는 높은 금리와 물가상승률을 겪고 있다. 아이슬란드 기준금리는 8%로, 유럽중앙은행(ECB)의 2.25%보다 훨씬 높다.
아이슬란드 주요 노동조합 비스카(Viska)의 빌리알무르 힐마르손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EU 가입으로) 아이슬란드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지만, 더 건전한 경제를 위한 촉매제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반대 진영은 경제 역시 아이슬란드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며 EU 가입 협상 재개에 반대했다. 특히 아이슬란드의 주력 산업인 어업과 농업 부문에서 EU의 각종 규제로 통제를 받을 것이라는 데 반발이 컸다.

EU도 이 점을 염두에 뒀다. 국민투표에 앞서 마르타 코스 EU 확대 담당 집행위원은 "어업과 농업에서 아이슬란드의 독특한 특징은 잘 알려져 있고 이는 신중하게 고려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1야당 독립당의 구드룬 하프스테인스도티르 대표는 "처음엔 EU가 몇 가지 유연성을 약속하겠지만, 영원히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며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실제로도 농어촌 지역에서 EU 가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았고 이번 투표 결과로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수도 레이캬비크 남부 선거구에선 투표율이 비교적 낮았고 찬성 54.5%, 반대 45.5%였다. 반면, 농어촌 마을이 많은 북서부 선거구에선 반대가 62.9%, 찬성이 37.1%였다.
아이슬란드가 민주주의, 삶의 질, 국민소득 등 각종 국제지표에서 세계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유럽경제지역(EEA)과 솅겐조약 가입국으로 이미 단일시장과 이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만큼 굳이 EU에 가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cheror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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