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답' 같은 반도체 벨트 과열 경계해야
(서울=연합뉴스) 윤선희 선임기자 = # 2000년대 중반은 울산에서 중화학 붐이 일던 때이다.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석유화학 단지가 동반 호황을 누리면서 울산은 전국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로 떠올랐다. 증시에서도 이른바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기업들이 신고가를 경신하면서 증시를 주도했다. 기업 이익이 극대화하면서 연말연시 최대 규모의 성과급 잔치가 열렸고, 이 뭉칫돈은 울산 부동산으로 흘러 들어갔다. "성과급 나오는 달에는 울산 백화점 매출과 집값이 들썩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울산에선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 직원 간의 자산·소득 양극화 문제도 컸다.
2010년대 거제도의 조선업 슈퍼 사이클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2010년대 초반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전 세계에서 수주를 싹쓸이하며 최대 호황을 누렸다. 거제도는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이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지나다니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만큼 유동성이 넘쳤다. 거제 아파트값뿐 아니라 원룸 월세까지 뛰었다.
2020∼2021년 코로나19 시기에는 비대면 특수로 카카오와 네이버, 대형 게임사들의 주가가 폭등했다. 인재 영입 경쟁에 연봉이 뛰고 임직원들이 받은 스톡옵션 가치가 치솟자 이들 회사가 있거나 가까운 판교·분당·광교 일대 아파트 매수세로 이어졌다.

# 지난해부터 우리나라는 온통 '반도체'로 들썩거리고 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수출주도형 국가인 우리나라에 역대급 경제·증시 호황이라는 선물을 주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초호황이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부동산 쏠림과 양극화를 자극하는 신호탄도 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실제 반도체 산업이 벌어들인 국부가 전체 경제로 골고루 퍼지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기업의 직원과 그렇지 않은 사람, 반도체 주식 보유자와 그렇지 않은 투자자 등의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코스피가 9,000을 넘었지만, 인공지능(AI)과 반도체 기술주만 독주할 뿐 전통 제조업이나 내수주, 코스닥은 소외돼 있다. 무엇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황에 따른 성과급, 사내 저리 대출 등의 막대한 유동성이 화성 동탄 '반세권'(반도체+역세권) 지역에 흘러들어 집값 과열을 이끄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부동산시장도 서울과 이들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이나 수도권 외곽은 침체를 겪으며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 과거 울산·거제·판교 사례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5년 이후 유가 급락과 중국의 추격으로 조선업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거품은 순식간에 꺼지고, 인력 이탈 등으로 거제 지역 전체가 침체의 늪에 빠졌다. 2022∼2023년 금리가 인상기로 접어들자 테크주 거품이 걷히고 주가가 폭락하면서 무리하게 대출을 끼고 집을 산 테크기업의 영끌족이 어려움을 겪었다. 울산에선 기반 산업이 흔들릴 때마다 도시 소비와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었다.
최근 동탄 등 반도체 벨트 과열 현상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실적에 기댄 '천수답'(天水沓·비에 의존하는 논)이라 할 수 있다. 반도체 사이클이 꺾이면 무리한 대출을 동원해 고점에 자산을 매입한 이들이 위험을 떠안게 된다.
# 반도체 호황으로 창출된 막대한 부는 미래를 위한 기술 투자, 신산업과 창업기업 육성, 취약계층 지원 등 생산적인 부문으로 선순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산 거품을 키우는 데만 소모되면 실물경제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기회를 놓치고, 호황 주기가 단축되는 부작용만 초래할 수 있다. 거품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 등의 정책이 이뤄지면 자영업자, 소상공인 등 서민층이 우선 영향을 받는다.
성장의 과실이 거품으로 증발하지 않고, 생산적인 곳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제 개편과 함께 정교한 지역·대출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산업이든 자산 가격이든 인생이든 영원히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떠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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