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실이 주미대사 인사절차 속도내도록 압박" 주장 제기
인사문건 공개도 부담…장차관 트럼프 험담 공개되나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미국 억만장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과 친분이 깊었던 정치인을 주미 대사로 임명했던 일과 관련해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정치적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피터 맨덜슨 주미 대사 임명 당시 외무부 내 최고위 행정직 공직자인 상임 차관을 지냈던 올리 로빈스는 21일(현지시간) 하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총리실이 맨덜슨 인사 절차에 속도를 내도록 끊임없이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로빈스 전 차관은 스타머 총리가 지난주 맨덜슨에 대한 부적절한 인사 검증 논란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인물이다.
지난해 1월 인사 검증 과정에 정부 공식 신원조회 기관인 영국보안심사처(UKSV)가 맨덜슨을 부적격으로 권고했으나 외무부가 통과 결정을 내려 맨덜슨이 그대로 주미 대사로 부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난주에야 드러났다.
빗발치는 야권의 사임 요구 속에 지난 20일 하원에 출석한 스타머 총리는 로빈스 전 차관이 본인이나 당시 외무장관이던 데이비드 래미 부총리 등 내각에 UKSV의 권고 사항을 보고하지 않은 탓으로, 이를 알았더라면 맨덜슨을 최종 임명하지 않았을 거라며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로빈스 전 차관은 "그(맨덜슨)가 가능한 한 빨리 미국에 부임해야 한다는 엄청나게 강한 기대감이 있는 상황에 내가 발을 들였을 뿐"이라며 "계속 쫓기는 분위기였다. 이 사무실, 저 사무실에서 계속 전화해 '아직 안 됐나'라고 물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보안 심사 자체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본인조차 일반적 관행대로 UKSV 권고를 구두로만 들었을 뿐 심사 보고서를 본 적도 없다고 덧붙였다.
로빈스 전 차관은 총리실에서 매슈 도일 전 총리실 공보국장을 대사직에 임명하려 했다는 새로운 '폭로'도 내놨다. 도일은 과거 아동 성범죄자 정치인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올해 초 노동당 당원 자격이 정지된 인물이다.

내달 7일 잉글랜드 지방선거와 웨일스·스코틀랜드 의회 선거를 앞두고 당 지지율 급락과 당내 압박을 받고 있는 스타머 총리가 위기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추가 악재는 계속해서 불거지는 모양새다.
스타머 총리로서는 총리직 보전을 위해선 야권보다도 집권 노동당 하원의원들의 입장이 중요한데, 일부 장차관 사이에서 스타머 총리와 거리를 두려는 미묘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에드 밀리밴드 에너지안보 장관은 이날 스카이뉴스에 본인과 래미 부총리가 맨덜슨 임명 당시 "문제가 터질 수 있다"며 우려하는 견해를 나눈 적이 있다고 말했다.

맨덜슨 임명 관련 정부 문건이 공개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스타머 정부에는 부담이다.
앞서 인사 과정을 전면 공개하라는 압박이 거세지자 스타머 총리는 관련 문건의 공개 여부 결정을 의회 정보안보위원회에 위임했다. 영국 정부 당국자들이 맨덜슨 임명과 관련해 주고받은 이메일, 문자나 왓츠앱 메시지 등도 공개 검토 대상이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장차관 및 고위 공직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관해 '최악의 언급'을 한 내용이 있으며 이는 공개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정보안보위원회는 외국 국가 정상에 관한 코멘트, 다른 나라의 국가 안보 정책에 관한 정보 등 외교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언급은 비공개 처리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 장차관급 소식통은 "외교적 논의가 공개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 당국자들은 맨덜슨 전 대사가 '필터 없이 생각을 그대로 내뱉곤 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에 관해 주위 동료들과 어떤 말을 했을지도 우려하고 있다.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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