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내 집에…" 우크라군 점령 장기화에 동요하는 러 국민
진격한 우크라군에 포로된 러 병사 가족들, 푸틴에 온라인 청원
피란민들, 군·정부 무능 질타…타지역서도 병역기피 움직임 확산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솔직히 전쟁 중이란 걸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 그 전쟁이 내 집에 불쑥 들이닥쳤다."
국경을 넘어 진격해 온 우크라이나군에 아직 10대인 아들이 포로로 붙잡혔다는 러시아 어머니 예브게니아 이즈마일로바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보내는 온라인 청원에서 이같이 적었다.
우크라이나와 2년반 동안 전쟁을 벌이면서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던 러시아 일반 국민들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달 6일 우크라이나군은 자국 북동부 수미주(州)와 맞닿아 있는 러시아 쿠르스크주(州)에 대규모 병력을 진입시켰고, 손쉽게 격퇴할 것이란 전망과 달리 러시아군은 보름이 훌쩍 넘은 현재까지도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선전 중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푸틴 대통령이 직업군인들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동부전선의 러시아군 주력을 쿠르스크로 돌리길 원치 않아서라고 한다.
결국 장비도 훈련도 부족한 징집병 위주인 쿠르스크의 러시아 수비군은 막대한 손실을 봤고, 병사들이 포로가 되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그들의 가족을 중심으로 반전여론이 꿈틀대고 있다고 더타임스는 설명했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이번 전쟁과 관련한 여론 동향을 추적해 온 연구기관 '오픈마인즈연구소'(OPI)도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 본토침공이 이번 전쟁에 대한 러시아 대중의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이른바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군사작전'에 대한 대중적 열광이 눈에 띄게 식었고, 특히 피해지역인 쿠르스크에서 그런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실제 전쟁을 피해 타지역으로 몸을 피한 쿠르스크 출신의 한 피란민은 온라인 포럼에 낡은 장난감과 파스타, 과자 한 봉지, 지방선거 홍보용 달력이 찍힌 사진을 올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라면서 "우리는 나라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돌봐왔다. 이제 그들은 우리를 집에서 개처럼 쫓아냈고, 구호물자를 위한 돈은 없지만 달력을 찍을 돈은 있다"고 적었다.
13만명이 넘는 피란민들을 돕기 위해 구호물자를 들고 쿠르스크를 찾은 러시아 여배우 야나 포플라브스카야는 "이 와중에도 모스크바에선 평화롭게 자고, 걷고, 인생을 즐기고 있다"면서 "장성들의 부모와 자녀를 쿠르스크나 전선 가까이에 데려다 둬야 한다. 그들의 친지가 여기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각에선 이번 사태로 푸틴 대통령의 지도력이 손상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지만 쿠르스크 주민들은 아직까진 푸틴 대통령과 직접적으로 각을 세우는 걸 피한 채 '태만한 지휘관들'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는 모양새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모스크바와 여타 지역에도 뒤숭숭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더타임스는 "병력 충원을 위해 추가동원이 이뤄질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징집을 피하려는 러시아인들을 돕는 조직들이 밀려드는 요청을 감당 못하는 실정"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추가 동원에 수반되는 정치적 위험을 고려할 때 이런 우려는 과장된 것일 수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고 이 매체는 덧붙였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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