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글와플 브뤼셀] 아바 배출한 '유로비전' 덮친 전쟁 그림자
68년 역사 유럽 최대 팝축제…대회마다 '정치논쟁' 휘말려
이스라엘 가수 논란속 결승 진출…결승전 당일 '팔 지지' 시위 예고
(브뤼셀=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난 이번 무대는 안 볼게."
지난 9일(현지시간) TV 생중계로 '유로비전' 준결승을 함께 보던 그리스인 지인 한 명이 이스라엘 가수 에덴 골란의 무대가 시작되자 갑자기 자리를 떴다.
30대 중반인 그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일을 생각하면 올해 참가를 아예 금지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지인의 '돌발 행동'에 이날 모인 10여명은 이스라엘의 대회 참가를 두고 때아닌 난상토론을 벌였다.
"음악과 정치는 별개"라며 이스라엘 참가를 옹호하는 이부터, "러시아는 안 되고 이스라엘이 된다는 건 서방식 이중잣대"라며 목소리를 높인 이도 있었다.
이날 유럽인의 유로비전 응원 문화를 현지에서 처음 지켜보면서 '유로비전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유로비전은 1956년 시작한 유럽 대륙 최대의 국가 대항 가요제다. 주최 측인 유럽방송연합(EBU)의 정회원인 방송사를 둔 30여개국이 참가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유럽보다 중앙아시아·중동에 가까운 이스라엘,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등이 참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각국은 매년 자국 최고의 '국가대표' 신인 가수를 내세운다. 이 무대에서 우승한다면 유럽을 넘어 글로벌 스타덤에도 오를 수 있다.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혼성 그룹 아바는 1974년 대회에서 '워털루'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셀린 디옹도 1988년 대회 당시 스위스 국적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월드 디바'로 발돋움했다.
참가자는 성소수자 지지부터 평화까지 시대를 앞선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무대를 선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주최 측은 '비정치화'를 강조하곤 하지만 큰 인기와 막강한 영향력 탓에 매년 크고 작은 잡음에서 자유롭지 않다.
올해는 이스라엘이 참가하는 것을 두고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민간인을 공격하는 이스라엘 출전을 허용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것이다.
아이슬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에선 음악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참가 금지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벨기에, 프랑스 등에선 정치인까지 나서 반대 여론에 동조했다.
골란이 이번 대회에서 부르려던 참가곡도 논란에 불을 지폈다.
참가자는 주최 측에 참가곡 승인을 사전에 받아야 하는데 골란이 처음 제출한 노래 '10월의 비'의 제목과 가사가 문제가 됐다.
제목과 가사가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을 연상케 하고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선전' 메시지를 담았다는 것이다.
결국 골란은 주최 측의 실격 처리 경고에 노래 제목을 '허리케인'으로 바꾸고 가사도 수정했다.
대회가 본격 시작되면서 긴장은 더 고조됐다.
골란이 무대에 오른 9일 준결승 당일 스웨덴 말뫼 시내에서는 1만여명이 넘는 시민이 팔레스타인 깃발을 들고 이스라엘 참가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대체로 평화적이었지만 현지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규모 경찰력이 투입됐다.
이스라엘 보안당국이 '신변 위협' 가능성을 이유로 골란에게 공식 일정 외엔 외출을 자제하라는 당부를 했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주최 측이 논란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있다.
2022년 대회 당시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러시아 가수를 실격 처리했지만 이번엔 8개월째 일방적 공습을 이어가는 이스라엘은 허용해 이중잣대를 들이댔다는 것이다.
주최 측은 초반 노래 수정 요구를 제외하면 가자지구 전쟁과 이스라엘 가수와는 '무관'하다며 참가 금지 요구를 일축해왔다. 유로비전 공식 홈페이지에는 FAQ란을 별도로 마련해 이스라엘 참가의 정당성을 부각했다.
또 대회 공연장 안에서 팔레스타인 깃발 게양을 금지하는가 하면 신체 일부에 '휴전과 자유'라는 글귀를 새긴 참가자에게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유로비전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75년 그리스는 튀르키예의 키프로스 침공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대회를 보이콧했고 이듬해 대회 때는 그리스가 튀르키예를 특정한 '반전' 주제 참가곡을 냈다는 이유로 튀르키예가 불참했다.
1992년에는 '사라예보 포위전'을 일으킨 유고슬라비아가 참가하지 못했다.
골란은 100% 시청자 투표로 결정되는 준결승에서 31개국 중 26개국이 진출하는 결승전 명단에 들었다.
결승전 당일인 11일에는 또 한 번 대규모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가 예고됐다. 현지 유대인 공동체 중심으로 소규모 맞불 시위도 예상된다.
올해도 결승전 누적 시청자만 2억명에 달할 테지만 끊이지 않는 논쟁에 '음악으로 하나되다'(United by Music)는 올해 유로비전의 슬로건도 무색해진 모양새다.
shin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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