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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설역사 쓰며 한때 '재계 10위' 오른 최원석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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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설역사 쓰며 한때 '재계 10위' 오른 최원석 전 회장
리비아 대수로 공사로 '중동붐' 주도…동아건설을 韓 대표건설사로
성수대교 붕괴·외환위기 거치며 그룹 공중분해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리비아 대수로 성공부터 성수대교 붕괴까지….
25일 별세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우리나라 건설사에서 주요 장면을 장식한 인물이다.
최 전 회장이 불과 25세의 나이로 사장을 맡아 이끌었던 동아그룹은 1945년 최 전 회장의 부친인 창업주 최준문 명예회장이 창립한 충남토건에서 출발했다.
충남토건은 원래 보령에서 간척사업을 하던 작은 회사였으나, 1957년 본사의 서울 이전과 함께 동아건설로 새출발 했다.
동아건설의 토대는 선대 창업주가 마련했지만, 전성기는 1966년 최 전 회장의 취임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건설은 특히 중동에서 잇달아 굵직한 사업을 수주하며 국내 건설업계에 중동 붐을 가져왔다.
1977∼1978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콰디마 항만공사, 1979∼1983년 사우디 알주와 산악도로 건설 등 굵직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동아건설을 세계에 알린 그는 1984년 20세기 최대 토목공사로 손꼽히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했다.
리비아 내륙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수천㎞에 이르는 송수관을 통해 공급, 사막을 옥토로 바꾼다는 구상 하에 추진된 이 사업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최 전 회장은 1991년 1단계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전 세계에 동아건설의 이름을 알렸다.
동아그룹은 이후 2단계 공사까지 수주하며 국내 건설사의 중동 진출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1단계와 2단계 공사 수주액은 각각 31억달러와 62억달러에 달했다.
해외에서의 잇단 성공에 힘입어 동아건설은 현대건설과 함께 국내 대표 건설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성공의 뒤에는 최 전 회장의 남다른 사업 수완과 추진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최 회장은 리비아 공사 현장을 직접 누비며 당시 리비아를 장기 집권하던 카다피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으며 최 전 회장이 카다피를 "카선생"으로, 카다피는 최 전 회장을 한국어로 "회장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최 회장의 사업 수완은 건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건설과 함께 주력 사업이었던 대한통운을 키우는 한편 1983년 공영토건과 동해생명을 인수해 동아생명을 출범하며 금융권에도 진출했다. 1992년에는 동아마스터비전을 세워 1995년 동아TV를 개국했다.
최 전 회장 지휘하에 동아그룹은 계열사를 22개까지 불려 나가며 재계 10위 기업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국내 건설사의 암흑기에도 최 전 회장과 동아건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동아건설이 시공한 성수대교가 1994년 붕괴되면서 4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 대표적이다.
최 전 회장은 무료로 성수대교를 재시공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혔지만 국민의 공분을 가라앉히기는 역부족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경영난에 직면했다. 보유 중인 1조원 규모의 경기 김포 매립지 일부의 권리를 정부에 넘기는 대신 용도 변경을 추진했으나 이러한 구상이 실패하면서 어려움이 가중됐다.
최 전 회장은 1998년 모든 보유 주식에 대한 처분권을 채권은행단에 위임하고 회장직을 내놓았으나, 동아그룹은 결국 그해 국내 기업 최초로 워크아웃에 들어갔으며 2001년 파산선고를 받으며 공중분해됐다.
동아그룹의 사세를 최정점에까지 이끌었지만 결국 동아그룹의 몰락도 최 전 회장의 임기 중 발생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법정 구속됐다가 2008년 사면되기도 했다.
최 전 회장은 당대 유명 연예인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개인사로도 유명세를 치렀다.
고인은 배우 김혜정, 가수 배인순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으며 마지막으로 1999년 27세 연하의 장은영 전 아나운서와 결혼했으나 2010년 헤어졌다.
사업가로서도, 결혼생활도 실패했지만, 그는 국내 문화와 스포츠계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부친의 유지에 따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그는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아 각종 예술인 지원사업을 펼쳤다.
1993년에는 첼로 신동 장하나에게 6억원 상당의 과다니니 첼로를 구입해 선물하기도 했다.
또 대한체육회 이사 및 대한올림픽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도 공을 세웠다.
최 전 회장은 1985년 동아방송예술대학교와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 등이 있는 학교법인 공산학원도 설립했다.
고인은 사면 이후 공산학원의 이사장직을 맡아왔다.
lucid@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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