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왕 사망후 1년…1천500채 사기에 "결혼·출산, 사치가 됐다"
총피해액 2천312억원 달해…피해자 4인 인터뷰
정부 대책 발표 5차례·특별법까지 제정됐지만…피해 회복 요원
피해자들 "수원서 또 터진 대형 사기…이번엔 땜질처방 안돼"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지난해 10월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모텔방에서 장기 투숙하던 4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빌라왕'으로 불린 김모(사망 당시 42세) 씨였다.
김씨의 죽음은 전세사기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계기가 됐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세입자 1천명 이상이 한꺼번에 드러나면서다.
애초 김씨 관련 주택은 1천139채로 알려졌지만, 경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보유 주택은 1천500채로 훨씬 많았다.
피해자만 1천244명이고 피해액은 2천312억원에 달한다.
김씨가 사망한 지 꼭 1년이 지났지만, 전세사기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정부 대책이 다섯 차례 발표되고,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까지 제정됐지만 대다수의 피해자는 1년 전 그 자리에 멈춰있다.
김씨 사망 후 1년간 이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사는 곳과 피해 유형이 각기 다른 피해자 4명을 인터뷰했다.
◇ 30대 근생빌라 피해자…"저출산요? 아이 낳고 싶어도 못 낳아요"
"MZ세대가 오마카세를 즐긴다고 하는데요, 저한테는 꿈이에요."
유모(31) 씨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에 산다.
2020년 5월, 겉보기엔 멀쩡한 6층짜리 빌라 1층에 보증금 1억6천만원을 주고 전세로 들어갔다.
전세 계약을 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 집주인은 김씨로 바뀌었다.
유씨는 김씨가 사망하기 5개월 전쯤 보증금 반환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계약 만기가 다가와 보증금을 내달라고 하자 김씨는 차라리 집을 사가라고 버텼다.
어쩔 수 없이 전세 계약을 연장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 알고 보니 유씨가 전세를 든 집은 주거용으로 사용해선 안 되는 근린생활시설에 원룸 탈을 씌운 불법 건축물, 이른바 '근생빌라'였다.
김씨 사망 후 백방으로 보증금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봤지만, 근생빌라는 정부 지원책과 특별법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어 유씨가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유씨는 "전세금을 조금이라도 건지려면 경매로 집을 떠안아야 하는데, 이행강제금이 걱정"이라며 "아직 학자금 대출도 남았고, 경락자금대출에 이행강제금까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온다"고 했다.
근생빌라는 불법이기 때문에 주거용으로 쓰면 매년 거액의 이행강제금(건물 시가표준의 10%)을 내야 한다.
그나마 저리 대환대출을 통해 매월 60만원대였던 전세대출 이자를 10만원대로 낮춰 숨통이 트였다. 지금까지 그가 이용한 유일한 정부 지원책이다.
유씨는 "내년 5월(전세 만기) 터지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밝았던 성격은 변했다.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한 스스로를 발견할 때마다 놀란다고 한다.
유씨는 "마음에 분노가 많다 보니 아무 관계 없는 타인에게까지 화가 치밀 때가 있다"면서 "사람 자체를 못 믿게 돼 이제는 친구도 잘 안 만난다"고 말했다.
결혼과 출산은 '사치'가 됐다.
유씨는 "다른 친구들과 비교가 되니 결혼식에 가기 싫어진다"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그 꿈을 박탈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모인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출산을 보류하게 됐다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고 한다.
유씨는 꼭 이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정부가 저출산에 몇조원씩 쏟아부으면 뭐 하나요. 전세사기를 당한 20∼30대는 결혼, 출산 계획이 다 망가져 버려요. 전세사기가 결국 저출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 20대 오피스텔 피해자…"2년 전으로 돌아가도 또 당했을 것"
"지금 지식을 갖고 2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전세사기를 피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철빈(29) 씨는 부동산 IT 스타트업에서 일한다.
그런 만큼 전세 계약 때 등기부등본에 건축물대장까지 꼼꼼하게 살피고 뜯어 봤는데도 당했다.
이씨는 2021년 11월, 전세보증금 2억1천만원에 서울 송파구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계약할 땐 압류·근저당 없는 깨끗한 주택이었다. 민간임대주택으로 등록도 돼 있었다.
전세 보증보험은 집주인이 가입한다기에 믿었다. 마침 임대사업자의 등록 임대주택 보증보험 가입이 전세 계약 전인 2021년 8월부터 의무화된 터였다.
그런데 집주인 김씨는 차일피일 가입을 미뤘다. 의심스러워 등기부등본을 떼 봤더니 계약할 땐 없던 세무서 압류가 떡하니 걸려 있었다. 종합부동산세 63억원 체납 탓이었다.
김씨 사망 후 이씨는 전세사기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문제 해결 전면에 섰다. 이씨 역시 결혼 계획을 미뤘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죽음, 호소, 집회에 직면한 정부가 수차례 피해 지원 대책을 내놓고 특별법까지 제정됐지만, 이씨 상황에 별다른 변화는 없다.
무엇보다 김씨의 상속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어서다.
세금 수십억원을 체납한 김씨의 재산을 상속받으려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사촌 이내 혈족인 4순위 상속인까지 상속을 포기한다는 의사 확인이 끝나야 법원에서 상속재산관리인을 선임하고, 경매 등 다음 절차로 나아갈 수 있다.
사망한 또 다른 '빌라왕'은 가족들의 상속 포기 의사가 빠르게 확인돼 피해 주택이 경매 절차로 넘어갔지만, 김씨의 4순위 상속인은 오래전 해외로 이주해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다. 절차는 그만큼 늦어진다.
이씨는 "다행히 올해 안으로는 상속 포기 절차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며 "부동산 경매 시장 상황이 좋지 않고, 오피스텔은 특히 낙찰이 잘 안되기 때문에 결국 경매에서 집을 떠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숨진 김씨와의 힘겨운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경기도 수원에서 대규모 전세사기가 또다시 터졌다는 소식이 이씨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씨는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 카톡방에 이틀 전 360여명이 있었는데, 오늘 보니 720명으로 2배가 됐다"며 "정부가 더는 미봉책, 땜질식 처방으로 끝낼 게 아니라 종합적인 예방·관리·감독 대책을 마련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열심히 대책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와닿는 게 없어 안타깝다"며 "정부가 피해자들과 만나는 자리를 정례적으로 만들어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전세사기 대책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했다.
◇ 30대 '보증보험 미가입' 빌라 피해자…"한집에 전세 피해자가 셋"
"어떻게 집을 1천채 넘게 가진 사람이 체납이 있는데도 아무런 제한 없이 계속해서 집을 사고 전세를 놓을 수 있었던 거죠?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국가가 사기를 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백이슬(34) 씨는 지난 1년간 전세사기 피해자 설명회에서, 국회 토론회에서, 집회에서 반복해서 대출·보증 등 잘못된 제도가 전세사기를 잉태시켰다는 목소리를 내왔다.
전세사기 피해를 보고 한때 죽을 생각까지 했지만, '혼자 죽느니 얘기는 해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일이다.
백씨가 2020년 11월 인천 서구에 구한 보증금 1억4천800만원짜리 빌라는 김씨 소유였다.
피해를 알아챈 건 전세 만기 전인 지난해 7월이다.
김씨가 소유한 다른 주택이 압류됐다는 사실을 알리는 한 부동산 컨설팅 회사의 우편물을 받고 김씨에게 연락했더니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압류 사실이 맞다면서 백씨가 사는 집에도 압류가 들어올 거라는 '예고'까지 했다.
백씨는 "그 이후 별짓을 다 해봤다"며 "그런데 1년 3개월간 딱히 변한 건 없다"고 했다.
지금 백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일이다. 여기엔 이제 익숙해져 버렸다.
백씨는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에 빨리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 '셀프 낙찰'받을 수 있길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선 김씨의 상속 문제가 정리돼야 한다.
전세대출 만기 연장과 대환대출이 그나마 버티는 데 도움이 됐다.
백씨는 "전세사기가 많은 인천에 경매로 넘어간 주택이 워낙 많아 경매 법원 업무도 마비가 올 정도라고 들었다"며 "이사 계획이 이미 틀어진 상황에서 경매 낙찰을 기다리며 2년, 3년을 더 보낼 수 없기 때문에 파산 관재인을 선정해 수의계약으로 집을 넘겨받는 방안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는 동안 백씨 가족 중에서 또 다른 전세 피해자가 나왔다. 사촌오빠와 사돈댁이 피해를 봤다.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은 포기했다.
어서 결혼하라고 밀어붙였던 백씨 어머니도 이제 '너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들고, 앞날을 모르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느냐'며 이해해 준다고 했다.
그는 "저야 선순위 임차인이라 길거리에 나앉는 일이 없는데도 이 정도인데, 빚만 있는 채 쫓겨나게 된 피해자 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느냐"면서 "언제 돈을 벌고 대출을 갚아 다시 '0원'에서 시작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 20대 '보증보험 가입' 빌라 피해자…"빨리 덮을 생각 말았으면"
"저한테 전세사기 빌라를 소개한 분양팀은 '빌라왕 사건'이 매일 같이 언론 보도 될 때도 태연하게 수원에서 활동 중이었어요. 새로운 임차인 물색해서 똑같은 사기 벌이는 거죠. 앞으로 터질 전세사기가 얼마나 더 많을까요?"
배소현(28) 씨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길 즐기는 헤어 디자이너였다.
2020년 10월, 신혼집으로 경기 수원 장안구에 구한 보증금 2억5천400만원짜리 신축 빌라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빌라 집주인은 전세계약 직후 김씨로 바뀌었고, 계약 만료 직전 김씨가 숨졌다. 보증보험에 가입했으니 전세금을 금방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보증금을 받으려면 임대인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임차권 등기를 마쳐야 한다. 그러나 사망한 김씨 피해자들에겐 첫 단계인 '계약 해지'를 통보할 당사자가 사라져 모든 절차가 중단돼버렸다.
보증보험이 '확실한 안전판'은 아니라는 게 드러난 셈이다.
세입자가 직접 집주인의 법적 상속인을 등기부등본에 올리는 '상속대위등기' 절차를 밟은 끝에 임차권 등기를 하고, 지난 2월 힘겹게 전세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상속대위등기에 든 비용 700만원은 배씨 부담이었다.
초반부 피해자 모임 대표로 활동하며 정부 지원책 발표를 끌어냈던 배씨는 이 과정에서 미용실을 그만뒀다.
그는 "예전에는 안정적인 것보다 도전하는 걸 좋아했는데, 전세사기 피해를 겪고 나서는 안정적인 게 더 좋다고 느껴 회사에 취업했다"며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아기를 가지려고 준비하던 중 전세사기를 당한 터라 출산도 뒤로 미뤘다.
2021년 터진 수원 세 모녀 전세사기 사건을 정부와 정치권이 유야무야 넘겼다가 지금에 이르렀다는 게 배씨 생각이다. 전세사기 사태의 경고등은 이미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배씨는 "정치인들이 내미는 대책은 '어떻게 하면 빨리 이 국면을 덮을 수 있을지', '피해자들 입을 빨리 다물게 할 수 있을지'에 집중돼 있다"며 "지금까지 나온 전세사기 대책으로 피해자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들도 보증금을 100% 다 돌려주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라며 "이들의 요구가 무리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한 번쯤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c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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