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 흥망' 중심 김석원…국회의원·스카우트총재로도 '조명'
31세에 쌍용그룹 물려받아 재계 6위로…쌍용차 경영악화·IMF사태로 '그룹 해체'
선친 이어 '재벌총수 국회의원'…고성 잼버리 주도 등 '스카우트 운동' 매진
(서울=연합뉴스) 김치연 기자 = 쌍용그룹 전성기를 이끈 경영인, 코란도와 무쏘의 아버지, 15대 국회의원, 고성 잼버리 유치….
쌍용그룹의 전성기부터 해체까지 모든 순간은 26일 별세한 고(故)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31세 젊은 나이에 회장에 취임해 80년대 쌍용그룹의 전성기를 이끌며 사세를 키웠지만, 1990년대 후반 쌍용자동차의 부진과 IMF 외환위기 사태로 손수 일군 쌍용그룹이 뿔뿔이 분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장본인이다.
경영인으로서 김 전 회장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뉘지만, 한국 스카우트 분야에서 김 전 회장이 남긴 업적은 화려하다. 1991년 고성 잼버리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 의장을 3년간 맡으며 한국 스카우트를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 31세에 그룹 총수로…자동차 사업 손대면서 그룹 '휘청'
대구 출신인 김 전 회장은 1975년 부친인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가 별세하면서 31세의 젊은 나이에 쌍용그룹을 물려받아 회장에 취임했다.
김 전 회장 취임 후 쌍용그룹은 말 그대로 제2의 빛나는 성장기를 보냈다.
김 전 회장은 1976년 쌍용중공업과 쌍용정유, 1977년 쌍용건설, 1978년 쌍용엔지니어링을 설립하고, 1984년 쌍용투자증권, 1985년 쌍용경제연구소, 1988년 쌍용투자자문 등을 세워 각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1973년 시작된 쌍용양회 동해공장을 연간 560만t 규모로 증설하는 사업을 7년 만에 이뤄내고, 1976년에는 이란 국영석유공사와 합작해 쌍용정유를 설립한 뒤 1980년 지분을 모두 인수해 쌍용정유를 국내 굴지 기업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 쌍용그룹은 한때 국내 재계 순위 6위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1995년 4월 1일 기준 쌍용그룹의 총자산은 10조9천540억원이었다.
이후 쌍용그룹은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김 전 회장이 야심 차게 추진한 자동차 사업, 그리고 김 전 회장의 정계 진출이 주원인으로 꼽힌다.
쌍용그룹은 1986년 동아자동차공업을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다.
한때 쌍용자동차는 코란도와 무쏘 등 지프형 자동차로 인기를 끌었으나, 이후 현대, 대우, 기아자동차가 급부상하면서 자동차 시장에서 점차 밀려났다.
자동차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지적이 안팎으로 일었지만, '자동차 애호가' 김 전 회장은 쌍용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했다.
수조원을 쌍용자동차에 투자했지만, 결국 쌍용자동차는 막대한 부채만 남긴 채 1998년 대우그룹에 매각됐다.
◇ 부친 이어 1996년 정계 진출…IMF 사태 겹치며 쌍용그룹 와해
쌍용자동차가 존폐 위기에 놓였을 무렵 김 전 회장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정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김 전 회장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대구 달성군에 출마해 금배지를 거머쥐었다.
김 전 회장이 정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부친인 김성곤 창업주의 영향이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성곤 창업주는 대구 달성에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돼 처음 정계에 발을 들인 뒤 제6∼8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을 지냈다. 한때 '공화당 4인방'으로 불릴 정도로 공화당 내 실력자였다.
하지만 1971년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키는 이른바 '10·2 항명 파동'의 주동 인물로 지목돼 중징계를 받고 정계를 떠났다.
부친의 정치 시련이 김 전 회장의 정계 진출의 동인으로 꼽힌다.
김 전 회장의 여의도행은 당시 '현역 재벌총수의 정계 진출', '정치의 가업 계승'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와 함께 쌍용자동차 부실이 겹치자 김 전 회장은 1998년 초 회사 경영을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쌍용양회 회장으로 복귀했다.
김 전 회장이 정치권을 뒤로하고 '구원 투수'로 나섰을 때 이미 회사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한때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회사를 인수하고 설립하며 사세를 넓히던 쌍용그룹은 계열사를 하나씩 정리하는 수순을 밟았다.
1998년 쌍용투자증권은 미국 H&Q AP에 매각됐고, 1999년 쌍용정유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사 펀드에 팔렸다.
2000년에는 쌍용중공업을 한누리투자증권 컨소시엄에, 2002년 쌍용화재를 중앙제지에, 2003년 용평리조트를 세계일보에 매각했다.
◇ 경영 일선 물러난 뒤엔 각종 소송 휘말려
김 전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부터 각종 법정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김 전 회장은 쌍용양회 소유의 강원도 평창군 토지 2곳 등을 헐값에 매수하는 방법으로 계열사에 310억여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2004년 구속기소 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2011년에는 계열사에 쌍용양회 자금 900억원을 부당 지원하고, 회삿돈 7억3천여만원을 횡령한 혐의가 일부 인정돼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선고받았다.
2007년에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신정아 사건'에 연루돼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검찰이 신정아 씨와 김 전 회장의 부인인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의 업무상 횡령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김 전 회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던 중 수표와 현금이 섞인 60여억원과 차명 통장을 발견하면서다. 발견된 자금 87억원은 모두 국고로 환수됐다.
◇ 용평스키장 만들고 스카우트 운동에 헌신
김 전 회장을 논할 때 스포츠와 스카우트는 빼놓을 수 없다.
김 전 회장은 1982년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에 선출된 이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카우트 운동에 헌신했다.
1990년에는 세계 스카우트 지원재단 부의장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강원도 고성에서 제17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2000년부터 3년간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 의장직을 맡아 전 세계에 한국 스카우트를 알리는 데도 기여했다.
스포츠와 문화 분야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다.
한국이 스키 불모지였던 1974년 용평스키장을 만들고 리조트로 개발해 향후 한국의 동계스포츠와 레저산업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개최된 세계청소년캠프 본부장을 맡아 청소년 국제교류에 기여했다.
또 1989년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현 한국장애인개발원) 초대 회장을 맡아 1991년 곰두리문학상(1998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으로 개칭)을 제정했다.
1995년에는 기금을 출연해 쌍용곰두리장학사업을 시작하는 등 장애인 복지와 문화생활 향상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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