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이단아' 재선에 미·러 희비교차…유럽 안보지형도 '출렁'
에르도안 재임기 중동 개입 강화…서방과 갈등 고조
스웨덴 나토 가입에 '어깃장'…러시아와도 제재 대신 경협
에르도안 "특정국가 배척 안해…서방제재 얽매이지 않을 것"
(이스탄불=연합뉴스) 조성흠 특파원 = "우리는 이번 선거로 미국에 교훈을 줘야 한다."
대선을 앞둔 지난 3월 튀르키예 주재 미국 대사가 야권 대선 후보인 공화인민당(CHP)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만나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대사로서 처신하는 법을 알라"며 한 말이다.
튀르키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의 일원이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집권 기간 중동 및 유럽 안보 문제는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까지 미국 및 서방과 종종 갈등을 겪으면서 '나토의 이단아'로 불렸다.
28일(현지시간) 대선 결선투표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이 같은 외교 노선도 당분간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
◇ 에르도안, 집권 후 지역 패권 추구…서방과 갈등도 심화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새로운 튀르키예의 세기'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건국 100주년을 맞아 오스만제국 시절 영광을 되살려 강력한 튀르키예를 만들겠다는 포부다.
실제로 에르도안 집권기 튀르키예는 기존의 친서방 노선에서 탈피해 중동과 아프리카 각지에 개입하며 지역 패권 경쟁에 뛰어들었고 서방과 갈등도 불사하는 등 독자적 외교정책을 펼쳤다.
2014년 시작된 이슬람국가(IS) 격퇴 작전 때는 미국 주도의 국제동맹국으로 참여했으나, 이후 미국이 지원한 시리아 내 쿠르드족 무장 조직과 전투를 벌이며 시리아 내전을 극도의 혼란 속으로 몰고 갔다. 리비아 내전,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 등에도 튀르키예는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2019년에는 러시아제 방공 미사일 S-400 구매 사건으로 미국과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미국은 러시아제 미사일 사용 시 나토 군사기밀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음에도 튀르키예가 미사일 구매를 강행하자, 튀르키예를 F-35 전투기 개발 프로그램에서 퇴출하고 F-16 판매까지 막았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이에 따른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 신청을 기회로 삼았다.
나토 가입에는 회원국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한데, 튀르키예는 스웨덴과 핀란드가 테러 조직이자 튀르키예 안보 위협 세력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을 옹호하고 있다면서 나토 가입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나토 확대가 절실했던 미국은 결국 기존의 방침을 철회하고 F-16 판매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핀란드의 나토 가입은 동의하고도 여전히 스웨덴에 대해선 동의 절차를 보류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와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 견제를 위해 만든 국제 협의체 상하이협력기구(SCO) 가입 방침도 밝혔다.
◇ 美, 대러 봉쇄 전략 차질…'튀르키예와 협력' 러는 안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근 미국 CNN 방송 인터뷰에서 재선 시 기존의 외교 노선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나는 어떤 지도자에게도 기분이 상한 적이 없고 모든 지도자와 협상한다. 한 국가를 배척하면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우리는 서방이 한 것처럼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상황이 아니며, 서방 제재에 얽매이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되면서 미국 등 서방과 러시아의 희비도 극명하게 엇갈리게 됐다.
미국은 흑해와 지중해의 연결로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하는 튀르키예를 통해 러시아를 단단히 봉쇄하려는 전략이 동력을 얻기 힘들게 됐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대선을 앞두고 "서방은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을 우려해 공식적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에르도안이 패배한다면 기뻐할 것임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전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튀르키예와의 경제 협력을 꾸준히 강화해온 러시아로선 이번 결과에 안도하게 됐다. 야당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는 집권 시 나토 핵심 회원국으로서 역할을 되살리겠다면서 러시아 제재에 대한 서방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밝힌 바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대선 직전 러시아가 건설 중인 튀르키예 최초 원자력발전소 연료 장전식에 화상으로 참석해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선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 스웨덴 가입 문제 '발등의 불'…우크라전 단기 해결에도 차질
이번 대선 결과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유럽 안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서방은 당장 오는 7월 리투아니아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를 앞두고 스웨덴의 나토 가입 문제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스웨덴이 반이슬람 노선을 보이고 있고 PKK 연루자 송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 삼아온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됨으로써 스웨덴과 서방이 튀르키예에 더욱 많은 양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튀르키예가 러시아의 제재 회피처가 된다는 우려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튀르키예와의 경제 협력을 통해 서방의 제재에 적응하고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가 바라는 대로 장기전이 되고 이는 서방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전략적 자율성' 추구는 튀르키예의 전통적인 외교 노선으로, 이를 반서방 일변도로 봐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있다.
이러한 입장을 내세우는 이들은 튀르키예가 우크라이나에 드론을 비롯한 상당량의 무기를 제공했으며, 평화 협상 주선과 흑해 곡물 협정 중재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NYT는 에르도안의 당선에 대한 서방의 반응에 대해 "기쁠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처럼 관리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수준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jo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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