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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상 키호이콴에 베트남 '무덤덤'…보트피플 출신 탓?
첫 베트남계 수상에도 화교출신이라 언론보도 인색…정부 관리도 '침묵'



(서울=연합뉴스) 김성진 기자 = 올해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받은 베트남 난민 출신 배우 키 호이 콴에 대해 베트남 현지 분위기가 무덤덤하다고 영국 BBC방송이 16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영화 '에브리씽'의 키 호이 콴은 지난 12일 오스카상 수상 소감에서 울먹이며 어린 시절 베트남 전쟁으로 난민 생활을 했던 것을 언급했다.
그는 "긴 여정을 통해 이렇게 큰 무대까지 올라왔다. 사람들은 이런 스토리는 영화에만 나오는 거라고 얘기하지만 이게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상 첫 베트남계 오스카 수상자 배출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공식적 반응은 가라앉은 편이다.
거의 모두가 국가 통제하에 있는 현지 언론은 키 호이 콴이나 그의 출신 배경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일부는 그가 동남아에 많은 화교라는 점을 베트남 출신이라는 것보다 더 강조했다.
탄니엔 신문은 "그는 1971년 호찌민시(사이공의 공식 이름)의 화교 가정에서 태어나 1970년대 말 미국으로 이주했다"고만 적었다.
베트남 정부 관리들이 키 호이 콴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베트남 뿌리를 밝히는 키 호이 콴의 태도와 대조적이다.
BBC는 베트남 현지에서 가급적 1970년대∼1980년대 어두운 근현대사를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베트남에서 주로 화교를 중심으로 150만명 이상이 보트를 타고 홍콩 난민캠프를 경유해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로 갔다. 키 호이 콴 가족도 이 중 하나였다.
보트피플 가운데 20만∼40만명이 조난을 당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비록 '미 제국주의'와 명운을 건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잿더미 위에서 전후 재건에 몰두해야 했고 중국과 관계도 경색돼 현지에서 화교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월남의 주요 자본주의자 계층으로 분류된 화교는 실제로 공산화로 베트남이 통일된 후 다수가 사상 재교육 캠프로 가야 했다.
이에 화교들은 갖고 있던 돈을 뇌물로 써가며 1978년 9월부터 대규모로 고무보트 한척에라도 의지해 망망대해로 나갔다. 특히 1979년 2월 중국의 베트남 공격 이후 보트피플의 엑소더스는 10여년간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키 호이 콴이 출연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원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7개 부문 트로피를 휩쓸면서 최다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영국 BBC방송 베트남어판 페이스북에선 키 호이 콴이 과연 베트남계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도 벌어졌다.
호주 시드니에 있는 뉴사우스웨일스대의 약학 교수로 역시 보트 피플 출신인 응구옌 반 투안은 "베트남 관영매체가 키 호이콴의 보트피플 배경을 무시한 것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베트남계는 화교 출신이든 순수 베트남 출신이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미국에서 매우 가난하고 영어도 못했지만, 결국 생존하고 번성했다고 덧붙였다.
sungji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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