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민주주의 위협하는 '내부의 적'…'자진신고'로 방어하는 미국
(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내부의 적(敵)'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하고, 정책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다.
영국과 전쟁까지 치르고 건국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유럽 열강이 신생국 미국의 국내 정치나 여론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 같은 우려가 법률로 구체화한 것이 바로 미국의 '외국대리인등록법'(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FARA)이다.
이 법은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외국 정부나 외국 기관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경우 스스로 그 사실을 미국 법무부에 신고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직자의 경우에는 외국을 위해 일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지만, 일반 시민은 직업의 자유 차원에서 외국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데 제한이 없다.
다만 외국 정부를 위해 일을 했다는 사실을 미리 신고해야 한다.
지난해 미국 검찰은 중국 정부가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에 설치한 '비밀경찰서'와 관련해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2명을 FARA 위반으로 기소했고, 이들은 유죄평결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특정 중국인의 주소를 찾아 중국 공안에 넘겼다는 혐의를 받았다.
범죄를 저지른 뒤 해외로 도망간 중국인을 강제 귀국시킨다는 이른바 '여우사냥' 작전을 도왔다는 것이다.
중국 비밀경찰서 관련자를 신속하게 단죄한 미국의 사법 체계는 한국의 상황과 대비된다.
지난 2022년에 서울의 한 중식당이 중국의 비밀경찰서로 지목됐을 당시 한국 거주 중국인의 강제 송환 등 다양한 의혹이 제기됐지만, 당국은 아무런 조치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주권 침해 논란까지 있었던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허무한 결론이다. 미국의 FARA와 같은 안전장치가 있었다면 당연히 결론이 달라졌을 것이다.
최근 중국이 해외 이민자 네트워크를 통해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면서까지 자국 이익을 추구한다는 지적이 확산하면서 FARA와 비슷한 방어책 마련에 나선 국가들도 적지 않다. 캐나다가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은 지난 2019년과 2021년 캐나다 총선에서 야당 보수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펼쳤다.
중국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는 중국계 캐나다인들이 대거 보수당 낙선 운동에 나섰고, 중국의 소셜미디어 위챗을 통해 보수당을 겨냥한 가짜 정보가 확산했다.
결과적으로 보수당은 집권에 실패했고, 중국의 공작은 성공했다.
이 같은 사실이 담긴 캐나다보안정보국(CSIS) 비밀문건이 지난해 언론에 공개되면서 여당인 자유당에 대한 비판이 확산하자,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중국의 정치 개입 등을 막기 위해 외국대리인등록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4년마다 국회의원 선거가, 5년마다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한국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한국은 외국인에게도 지방선거 투표권을 부여할 정도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개방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인터넷 등을 통한 의견교환도 실시간으로 자유롭게 이뤄진다.
다만 그만큼 외부의 영향력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안전장치도 마련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주권과 민주주의 제도의 골간이 침해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은 모든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겠지만, 특히 입법권을 지닌 정치권이 서둘러 논의해야 할 사안으로 보인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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