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기후 디스토피아' 파키스탄…"대홍수 뒤 썩은 물로 연명"
작년 6∼9월 몬순 폭우 강타…국토 3분의1 잠겨 삶의 터전 '수몰'
"모두 버리고 도망쳤다"…오염된 물 마시는 주민들 질병 시달려
(우메르콧·다두[파키스탄]=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내비게이션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1일(현지시간) 파키스탄 신드주(州) 우메르콧시(市) 외곽을 지나는 도로 양옆으로 끝없이 '호수'가 펼쳐졌지만, 내비게이션 지도엔 어디에도 호수가 있다는 표시는 없었다. 지도상으론 민가와 밭, 길이 있어야 했다.
"몇 달 전까지 여기가 마을이었어요. 저쪽엔 밭이 있었고요. 홍수가 덮치기 전까진 말이죠."
취재차량 운전기사가 밭이었다며 가리킨 곳은 구정물이 찰랑거리는 잿빛 호수였다. 깊이는 어른의 허리를 넘길 정도다. 물 위로 쓰레기가 떠다녔고 폐수처럼 거무튀튀했다. 몇 달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파키스탄에선 지난해 6∼9월 몬순 폭우로 국토의 3분의 1이 잠기고 인구의 7분의 1인 3천300만명이 수재민이 됐다. 남아시아에서 여름철 몬순 우기는 해마다 돌아오지만 지난해 피해는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컸다.
그렇지 않아도 인프라가 부족한 터에 대홍수는 빈곤한 국민의 삶을 파괴해버렸다.
당시 셰리 레흐만 파키스탄 기후변화부 장관은 '괴물같은 몬순'이라면서 '기후 디스토피아'라는 이름울 붙였다. 대홍수의 원인으로 기후 위기를 지목한 것이다.
차로 10분쯤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물의 마을'이 나왔다. 학교로 보이는 건물의 지붕이 수면 위로 삐쭉 솟아 나와 있었다. 40채가량 있던 주택 대부분이 지난 여름 폭우와 홍수를 견디지 못하고 쓸려 내려갔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을 해치고 걸어간 곳에서 30대 여성 라지바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뒤쪽에 아무렇게나 쌓인 벽돌과 지푸라기 더미를 가리키며 "일곱 식구가 같이 살던 우리집이었다"고 했다.
근처에 있는 40대 여성 바기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2주 내내 그치지 않고 내렸어요. 곧 그치리라 생각했지만 무섭게 물이 불었어요. 결국 남편, 아이 셋과 함께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높은 곳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바로 옆집에 살던 남동생 식구도 그렇게 도망 나왔어요."
피난 후 사흘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옷가지도 챙겨 나올 틈이 없었던 탓에 석 달간 같은 옷을 입는 바람에 몸에서는 썩는 냄새가 났다. 비바람이라도 피하려 조금 떨어진 곳에 진흙으로 대강 집을 지어 살고는 있지만, 올여름 폭우라도 닥친다면 이마저도 쓸려 나갈 게 분명해 보였다.
우메르콧시 외곽에선 이렇게 날림으로 지어진 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나뭇가지로 기둥을 세우고 나무껍질이나 버려진 카펫, 천으로 겨우 덮어 지붕을 만들었다.
"5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건 처음 봤어요.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는데…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지요. 식구 14명이 집을 버리고 2시간 동안 헤엄치다시피 탈출했습니다."
신드주 서쪽 도시인 다두시의 외곽 마을도 우메르콧처럼 대홍수로 삶의 터전이 파괴된 곳이다.
이곳 주민 후스나는 피난을 간 그날의 두려움과 비통함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끊임없이 비가 왔다. 먹고 살게 해주는 당나귀와 소까지 버렸다"며 울부짖듯 말했다.
후스나의 마을은 80% 정도가 홍수로 부서졌다. 당시 무너져내린 벽돌이 아직도 마을 이곳저곳에 무덤처럼 쌓여 있었고 집은 고대 유적처럼 뼈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주인잃은 신발 한 짝이 휘날리는 모래바람 속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홍수 이전 마을 주민들은 목화나 밀, 채소를 재배하거나 당나귀로 물건을 옮겨주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홍수로 가축이 떠내려가고 밭이 수몰되면서 당장 먹고살 방도가 없어졌다. 홍수 이후 호구지책으로 가내 수공업으로 카펫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집도 있다고 했다.
홍수에 집을 빼앗긴 이곳 주민들 역시 손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 들어가 산다.
14세 소년 시오반도 가족과 함께 진흙으로 집을 지었다고 했다. 그는 "살아남아 신께 감사할 뿐"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주민들의 가장 큰 걱정은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이다.
물난리 때문에 물이 없어진 셈이다.
수해로 수도시설이 파괴되는 바람에 이들은 직접 식수를 여기저기서 구해야 하는 처지다. 유엔아동기금(UNICEFF·유니세프)이 식수를 제공하는 마을은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그렇지 못한 마을 주민들은 지난여름부터 고인 물을 퍼다 마시는 처지다.
라지바이도 유니세프에서 식수를 주기 전까지는 마을을 통째 집어삼킨 그 물을 마셨다고 했다. 아이들은 더러운 물을 마시고 설사와 고열에 시달려 생사를 오갔다. 유니세프 조사 결과 신드주 어린이 10명 중 9명이 오염된 물 때문에 설사를 호소했다. 콜레라와 뎅기열, 장티푸스 환아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었다.
이날 우메르콧 마을에도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넝마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물을 긷기 위해 세숫대야만 한 통을 들고 물가로 나왔다.
물길 위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소 떼가 물가에 모여 있었다. 가축의 분변과 각종 쓰레기가 섞인 물로 씻고 또 그 물을 마시는 셈이다.
제대로 씻지 못하고, 씻더라도 오염된 물이다 보니 피부병에 걸리는 아이도 늘었다. 신드주 어린이 77%가 옴 등 피부질환으로 고통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민들은 정부마저 손을 놨다고 한탄했다.
1천500명 이상이 숨진 국가적 재난이지만, 이전부터 이어진 극심한 경제난으로 파키스탄 정부는 사실상 구호를 포기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극심한 경제난 때문에 이재민 캠프를 철수한 지 오래다.
그런 사이 이들은 언제 또 닥쳐올지 모르는 폭우를 걱정으로 하늘만 쳐다보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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