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원 사표 후 현대음악 도전한 해금연주자…카네기홀서 '갈채'
작곡가 여수연, 2016년 크로노스 콰르텟과 작업 후 첫 작곡…거장들도 인정
(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30대 중반에 국립국악원을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건너와 현대음악으로 진로를 변경한 여수연(42)은 미국에서 주목받는 신예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기존의 현대음악과 다른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일부 미국 언론은 '선구자'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여수연은 지난 27일(현지시간) 뉴욕 카네기홀에서 현대음악계 최고의 사중주단으로 꼽히는 크로노스 콰르텟과 무대에 올라 자신의 작품 '옛소리'를 협연했다.
이 곡은 여수연이 국립국악원을 휴직하고 캘리포니아주립대(UC 버클리) 객원 연구원 자격으로 미국에 체류했던 지난 2016년에 완성한 첫 작품이다.
당시 여수연은 해금 연주자로서 크로노스 콰르텟과 협연을 준비하던 중 이 곡을 작곡하게 됐다.
여수연의 해금 연주에 매료된 크로노스 콰르텟의 바이올린 연주자 데이비드 해링턴이 "한국 전통음악을 배우고 싶다"며 여수연에게 작곡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여수연은 "작곡을 배운 적이 없고, 작곡을 해 본 경험도 없다"고 거절했지만, 해링턴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작곡에 도전하게 됐다.
이렇게 탄생한 '옛소리'는 국악과 서양음악에 모두 익숙한 사람에게도 현대음악이 아닌 전통 음악으로 들릴 수 있을 만큼 국악의 문법에 충실한 5중주 곡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가 국악의 음계를 따라 연주하고, 곡 후반부에 등장하는 징은 업모리와 자진모리, 진양조 등 국악의 장단으로 나머지 연주자들을 이끌어간다.
작곡하는 데 2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처녀작이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당초 2017년에 열릴 페스티벌용으로 작곡을 의뢰한 크로노스 콰르텟도 이후에도 '옛소리'를 꾸준히 무대에 올렸다.
크로노스 콰르텟의 수많은 레퍼토리 중에서도 관객들의 평가가 좋은 곡이라는 방증이다.
실제로 이날 카네기홀을 찾은 뉴욕의 현대음악 애호가들도 크로노스 콰르텟과 여수연의 협연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여수연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옛소리' 작곡을 계기로 인생경로도 크게 달라졌다고 밝혔다.
그는 12년간 소속됐던 국립국악원에 사표를 냈다. 해금 연주자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지만, 현대음악이라는 새로운 길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당시 국립국악원 소속 연주자 50명 중 1명으로 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나만 할 수 있고, 내가 너무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크로노스 콰르텟과의 작업 때문에 용감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무모해 보일 수 있는 결단이었지만 미국 현대음악계는 국악을 기반으로 한 여수연의 음악 세계를 예상보다 빠르게 받아들였다.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 중 거장으로 꼽히는 줄리 울프와 데이비드 랭이 설립한 현대음악 연주단체 '뱅 온 어 캔'은 2019년 여수연의 실내악 작품 '두드림'을 무대에 올렸다.
여수연은 당시 인연으로 울프의 추천서를 받아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해금 연주자로서 서울대 음대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서양음악과 악기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위해 추가로 학습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수연은 미국 생활을 시작한 뒤 국악적 색채가 나지 않는 곡도 발표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국악과 해금 연주에 바친 만큼 음악적 정체성은 국악이라고 강조했다.
여수연은 "다른 작곡가들이 피아노로 곡을 구상한 뒤 작곡하는 것처럼 나는 해금으로 곡의 스케치를 한다"며 해금을 '모국어'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해금은 내 모국어인 만큼 무엇을 해도 그 뉘앙스가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수연은 크로노스 콰르텟을 비롯해 미국 현대음악계의 거장들과의 공동작업을 이어나가는 것과는 별도로 앞으로 대규모 편성의 해금 협주곡을 작곡해 미국 무대에 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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