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00일 앞둔 멜로니 伊총리, 극우·과격 이미지 뒤집었다
우려와 반대로 친EU 행보…"이탈리아는 유럽과 서방세계 일부"
트러스 반면교사 삼았나…과감한 재정 지출·감세 공약 철회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조르자 멜로니(46) 이탈리아 총리가 오는 29일 취임 100일을 맞는다.
그는 지난해 10월 22일 이탈리아 사상 첫 여성 총리로 공식 취임하며 드높았던 유리천장을 깨뜨렸다.
취임 100일을 앞둔 현재, 멜로니 총리가 깨뜨린 것은 또 있다. 그에게 짙게 각인된 과격하고 위험한 이미지는 이 기간 상당 부분 해소되거나 희석됐다.
멜로니가 총리로 취임할 때만 해도 유럽 곳곳에서는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타이틀보다는 '100년 만의 극우 성향의 총리'라는 점에 주목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극우 파시즘 정권을 수립한 지 정확히 100년 만에 이탈리아에서 다시 극우 성향 정부가 등장하자 유럽 사회는 바짝 긴장했다.
과거 '이탈리아 우선'을 외치며 유럽연합(EU) 탈퇴를 주장했던 멜로니 총리가 EU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EU의 분열을 초래한다면 반러시아 단일대오를 구축하던 유럽에 큰 위기가 될 터였다.
멜로니 총리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50%에 달하는 높은 국가 부채 비율에도 선거 공약으로 자영업자 감세, 에너지 비용 보전 확대, 최저 연금수령액 인상 등 대대적인 재정 투입을 약속했다.
전 세계적 경제 위기 와중에 탄생한 이탈리아의 차기 정부가 방만하게 재정을 운영할 경우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팽배했다.
그러나 멜로니 총리가 집권한 약 100일 동안 이러한 우려와 걱정은 대부분 사라졌다.
멜로니 총리는 취임 후 첫 국정 연설에서 "이탈리아는 유럽과 서방세계의 일부"라며 "푸틴의 에너지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멜로니 총리는 첫 해외 방문지로 EU 본부가 위치한 벨기에 브뤼셀을 택하며 이탈리아가 EU 체제를 계속 지지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소피아 벤투라 볼로냐대 정치학 교수는 멜로니 총리의 친EU 행보에 대해 "우리는 일종의 탈바꿈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벤투라 교수는 "야당 정치인이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발언 수위를 온건하게 조절하고 있다"며 "멜로니 총리가 신뢰받는 국제 지도자가 되려면 변신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한 멜로니 총리는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과감한 재정 지출과 대대적인 감세를 대부분 철회했다.
치솟는 기름값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난해 3월부터 시행됐던 유류세 인하 조치도 올해 들어 종료하며 재정 여력 확보에 나섰다.
이를 두고 멜로니 총리가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의 감세안 파동을 반면교사로 삼았다는 평가도 있다. 성급한 감세안으로 역풍을 맞은 트러스 전 총리는 멜로니 총리의 취임 이틀 전 사임했다.
트러스 전 총리의 감세안 파동을 지켜보면서 멜로니 총리가 재정 건전성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이탈리아는 2026년까지 1천915억유로(약 258조원)에 이르는 코로나19 회복기금을 EU로부터 지원받는다.
마리오 드라기 전 총리가 재임 기간 700억유로(94조원)를 지원받은 상황에서 나머지 기금을 차질없이 받으려면 멜로니 총리 입장에선 EU와 충돌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
서방 언론에서도 이제는 멜로니 총리 앞에 붙였던 극우 지도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우파 지도자로 부르고 있다.
자국 평가도 아직은 호의적이다. 멜로니 총리가 대표로 있는 정당인 이탈리아형제들(FdI)은 25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30.5%를 획득했다.
직전 여론조사 때의 31.7%보다 하락한 수치지만 주요 연정 파트너인 동맹(Lega), 전진이탈리아(FI)보다 여전히 3배 이상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야권이 여전히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집권 연정은 5년 가는 정부를 만들겠다며 단합을 과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집권 연정이 큰 잡음 없이 국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평화가 오래갈지는 미지수다.
한때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동맹 대표)와 3차례 총리를 지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진이탈리아 대표가 '조연' 역할에 만족하기에는 둘 다 정치적 야심이 크기 때문이다.
살비니 부총리는 동맹의 텃밭인 밀라노 등 북부 지역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잘 사는 북부 주민들이 낸 세금으로 가난한 남부 주민들을 보조하는 데 대해 북부 지역의 불만은 큰 편이다.
그러나 이는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큰 지지를 받는 FdI의 대표인 멜로니 총리가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이다.
멜로니 총리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순간, 살비니 부총리가 총대를 매고 북부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고, 이는 집권 연정이 흔들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망했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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