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EU도 가세한 '보조금 경쟁'…고래싸움 낀 한국
(브뤼셀=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우리는 우리의 유럽식 IRA로 답해야 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14일(현지시간)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앞서 여러 차례 공개석상에서 미국 IRA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긴 했지만, EU 행정부 수장 격인 그가 작심한 듯 쏟아낸 이날 발언은 다른 때보다 무게감이 달랐다.
그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기조와 북미산에 한정한 각종 세금감면 및 보조금 혜택 등 IRA의 '차별적 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불공정 경쟁이며, 이로 인해 EU 역내 기업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EU 내에선 IRA가 역내 투자 유치의 걸림돌이 될 것이란 시각도 팽배하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발언에 이어 약속이라도 한 듯 이튿날 EU 입법기관 수장인 로베르타 메촐라 유럽의회 의장도 기자회견에서 미 IRA를 언급하면서 "분명한 건 한가지다. 지금은 우리가 동맹들과 무역전쟁을 할 때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런 기류는 이달 초 미-EU 간 제3차 무역기술위원회(TTC)에서 IRA와 관련,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더 강경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내달 미 IRA에 맞서 EU에 투자한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규정을 완화하고, 공공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을 내놓겠다고 예고했다.
그간 공정경쟁을 교란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기시해온 '보조금 경쟁'에 스스로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무역전쟁'은 안 된다며 내놓은 해법치고는 자기모순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글로벌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미국 IRA로 인한 투자 유출을 방지하려면 EU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차선책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미국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초유의 에너지 위기를 겪는 EU로선 어떤 면에선 더 절실한 상황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이미 내놓은 산업 정책에서도 EU의 '절실함'은 여과 없이 드러난다.
내년 초 유럽의회 표결만 남겨둔 EU의 '유럽 반도체법'(The European Chips Act)이 대표적이다.
EU는 반도체법을 통해 오는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생산 시장 점유율을 현재 9%에서 2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공공·민간 투자를 통해 반도체 생산 확대에 430억 유로(약 59조 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특히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결국 EU까지 가세한 '고래 싸움'에 '수출로 먹고산다'는 한국 입장에선 정부도, 기업도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급변하는 통상 환경에 한국 수출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면밀한 준비를 하되, 선진국들이 기후변화 대응, 역외 의존도 탈피 등 다양한 명분으로 산업 구조 전환을 꾀하는 만큼 우리 자체적인 몸집을 키울 중·장기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취재 중 만난 한 업계 관계자도 "보호주의가 팽배할 때는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서 EU와 같은 보조금을 오히려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에 최근 인기를 끄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극 중 주인공이 '대기업 총수'에게 한 조언이 묘하게 오버랩됐다.
"고래 싸움에 새우가 등 터지기 전, 새우가 몸집을 불려야 한다."
shin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