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타이항산에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기념관 건립
(스자좡=연합뉴스) 한종구 특파원 =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자락의 한 농촌 마을에는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자 중국 조선족 문단의 거목이었던 김학철(金學鐵.1916∼2001) 선생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타이항산은 조선의용대가 일제와 치열하게 싸운 곳이고, 전시관이 들어선 허베이성 스자좡시 후자좡 마을은 김학철을 비롯한 조선의용대가 처음으로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지원 없이 일제와 단독으로 맞선 곳이다.
최근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시 시내에서 승용차로 1시간 이상 달려 타이항산 자락에 있는 후자좡 마을을 찾았다.
기록에 따르면 1941년 12월 12일 새벽 조선의용대 29명은 시안사변 5주년 기념대회를 위해 후자좡 마을 한 민가에 머물던 중 일제의 기습 공격을 받는다.
이 전투로 대원 4명이 목숨을 잃었고, 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붙잡혀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됐다.
이후 총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김학철 기념관은 조선의용대원들이 일제의 공격을 받은 바로 그 민가 내부에 마련됐다.
전투가 발생한 지 80년이 지났지만, 김학철과 조선의용대를 기려야 한다는 후자좡 마을 원로들의 제안으로 주민들이 인근 관광지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10월 기념관을 세웠다.
마을 주민의 소개로 잡초가 무성해 폐가처럼 보이는 주택 입구에 들어서자 중국어와 한글로 쓰인 '조선의용군 전적지 옛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공산당과 공산주의의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은 '홍색 애국주의 교육기지'라는 현판도 걸려 있었다.
중국 전통 가옥 양식인 사합원 형태로 지어진 주택 내부로 들어가자 정면에 '김학철 기념관'이라고 쓰인 편액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념관은 작은 방 2개를 개조해 만들었다는 설명처럼 규모가 작았지만, 벽에는 김학철의 생애를 소개하는 각종 사진과 설명이 빼곡했다.
김학철이 지인에게 선물했다는 친필 사인 저서 등도 일부 보관돼 있다.
기념관의 편액은 중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쉬광야오가 썼다.
마을 주민은 작년 10월 편액을 설치하고 개관식을 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외부인이 기념관을 찾은 것은 사실상 처음이라고 전했다.
191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학철은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에는 소설가로 활동한 중국 옌볜 조선족 작가다.
광복 후 목발을 짚고 귀국해 북한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게 되지만 김일성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195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인민이 굶어 죽는데 웬 우상 숭배냐"는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 '20세기의 신화'로 필화를 겪으며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1980년 복권돼 창작 활동을 재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편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20세기의 신화' 등과 소설집 '무명소졸', '태항산록',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생의 마지막까지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不義)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후자좡 마을 입구에는 '잃어버린 민족문학사를 찾아가는 작가모임'이 2005년 허베이성작가협회, 중국옌볜작가협회와 공동으로 건립한 김학철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 주민 후수잉 씨는 "후자좡 전투와 김학철을 기억하기 위해 주민들의 노력으로 작게나마 기념관을 조성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이곳에서 쓰러져간 조선 청년들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국 내 교민들을 중심으로 기념관에 전시물을 늘리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베이징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재중항일역사기념사업회 홍성림씨는 "김학철 기념관이 중국인들에 의해 건립돼 소박하게 운영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다"며 "귀중한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닌 만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jk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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