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전쟁 100일] 美, 장기전 대비 속 民心 향배 따른 출구전략 고심
천문학적 지원 지속·고위급 잇단 우크라行 통해 '항전 의지' 다져
동맹 규합 성공하며 러·中 고립 가속화…美 주도 세계질서 공고화
인플레 등 전쟁부담 가중…중간선거 앞두고 우크라해법 논란 커질듯
(워싱턴=연합뉴스) 이상헌 특파원 = "이 싸움은 며칠 또는 몇 달 안에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긴 싸움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을 필요가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6일 우크라이나 접경국인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연설 중 한 대목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이 되던 시점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100일이 다가오면서 장기전을 예언한 듯한 이 발언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겨울 끝자락에 시작한 전쟁은 어느덧 여름에 이르렀지만 평화의 조짐은 아직 없다.
바이든 대통령은 내치와 외교의 초점을 우크라이나 전쟁에 두면서 언제 끝날지 모를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미국은 전쟁 초기부터 유례없는 대(對)러시아 '폭탄 제재'를 이어가는 한편으로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방어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인도적 지원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도록 전쟁 물자를 끊임없이 나르고 있다.
냉전시대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는, 과거의 라이벌 러시아를 상대로 우크라이나를 통해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미국은 최근 400억 달러(약 49조6천400억 원) 규모의 우크라이나 지원법안을 추가로 통과시켰다. 바이든 대통령은 방한 중이던 지난달 21일 법안에 서명했다. 그만큼 그의 머릿속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판도를 바꿀 '게임체인저'로까지 불리는 무기대여법도 81년 만에 꺼내 들었다.
이 법은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때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절차적 장애 없이 연합군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도록 허용한 법이다. 우크라이나에 군수품을 신속하게 지원하도록 개정한 이 법이 통과되면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속도가 붙고 있다.
미 고위 인사들이 잇따라 전쟁터를 찾은 것 역시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지 의지 표방과 함께 장기전을 대비한 포석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찾지 않았지만, 부인 질 바이든 여사는 지난달 8일 신변 위험을 무릅쓰고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했다.
미국 권력 서열 3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4월 말 수도 키이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했다. 펠로시 의장은 이 자리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고 다짐했다. 이 자리엔 미 의회 외교·정보 최고위 직위인 하원의 그레고리 믹스 외교위원장과 애덤 시프 정보위원장도 동행했다.
그보다 일주일 앞서선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키이우를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했다.
미국이 이처럼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으면서 대러 항전을 측면 지원하는 데에는 바이든 대통령의 핵심 외교 철학인 '동맹 규합'도 자리 잡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 무너졌던 동맹관계를 자연스레 복원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공고화라는 일석이조 효과를 누릴 기반을 다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군사적·경제적으로 팽창 중인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궁극적인 목표 지점과도 맞닿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침략국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지원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러시아와 중국 고립 전략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이런 외형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전쟁 장기화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40년 만에 찾아온 물가 급등에 경제는 이미 빨간불이 켜졌다.
미국 내부에선 출구전략에 대한 얘기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국제정치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은 지난 5월 하순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설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얻으려 하지 말고 조속히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가 이번 전쟁 이전에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마저 회복하겠다는 태도를 버려야 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도 당장의 분위기에 휩쓸려 전쟁을 더 길게 끌고 가기보단 협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 논란이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발언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지만, 전쟁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미국 경제를 강타하고 중간선거가 다가올수록 바이든 대통령의 머릿속은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장거리로켓시스템을 지원해 달라는 우크라이나의 집요한 요구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이 최대 사거리가 수백km에 이르는 로켓시스템 대신에 사거리가 80km이내로 제한된 첨단로켓시스템을 지원하기로 한 것도 이런 고민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에서 쫓아내는 것이 지원의 목적인 만큼 러시아 영토까지 공격할 수 있는 무기는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셈이다.
개전초부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군을 우크라이나 땅에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온 것도 마찬가지다.
미군 개입으로 인해 자칫 미·러간 분쟁으로 비화할 경우 전쟁 장기화는 물론 세계 최대 핵보유국 간 3차 세계대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침략자 러시아를 응징하되 가급적 덜 자극하겠다는 의도로 비치는 부분들로, 러시아와 외교를 통해 전쟁을 끝낼 여지를 남기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의 정치적 명운은 5개월 앞으로 다가온 중간선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에 대한 평가에서 부정적 의견이 높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AP통신과 시카고대 여론연구센터(NORC)가 지난달 20일 내놓은 조사에선 전쟁 대응이 '부정적'이라고 답한 사람이 54%로 '긍정적'이라는 평가(45%)를 앞섰다.
개전초만 해도 바이든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에 대해 여론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류는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로 표출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 국정지지도는 조사 때마다 연거푸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며 고전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중간선거에서 참패의 성적표를 받아들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출구 찾기를 본격 모색할지, 전쟁 지원의 명분을 강화해 국내외 장애물을 정면 돌파할지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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