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분홍빛 물드는 중남미와 흔들리는 美 리더십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이번 달 반상회는 마침 반장네 집에서 열릴 차례였다.
반장은 평소 물의가 잦은 '문제적' 주민 3인방은 초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반발한 것은 이 3인방만이 아니었다.
이들과 친한 한 주민은 "반상회엔 우리 반 모든 주민을 초대하는 게 맞다"며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 주민을 잘 따르는 다른 주민 몇몇도 동참했다.
문제 주민 3인방과는 친하지 않지만 평소 반장에게 이런저런 불만이 있던 일부 주민들도 이때다 싶었는지 불참을 선언했다.
이번 달 반상회, 무사히 치러질 수 있을까.
때로는 모임의 흥행 여부가 주최자의 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내달 6∼10일(현지시간) 제9차 미주정상회의 개최를 앞둔 미국은 꽤 속내가 복잡할 것이다.
1994년 1차 회의 이후 28년 만에 다시 개최국이 된 미국은 쿠바와 베네수엘라, 니카라과를 초청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방침을 시사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정식 대통령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 야권 지도자를 대신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한다.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이 작년 무리한 4연임에 성공했을 때 미국은 '사기 대선'이라고 비난했다.
쿠바의 경우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비민주적이고, 국민의 인권을 탄압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한때 미국이 '폭정의 트로이카'로 지칭한 이들 3국 정상을 자국으로 초청해 함께 단체 기념사진까지 찍는 그림은 아무래도 좀 어색하다.
미국이 이들 3국에 대한 불초청 가능성을 언론에 흘린 후 곧바로 멕시코 대통령이 반기를 들었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미주 모든 나라가 초청받는 게 아니라면 자기 대신 외교장관을 보내겠다고 했다.
볼리비아, 온두라스,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수위는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의 일부 국가 배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최근 몇 년 새 좌파로 정권이 교체된 나라라는 것이다.
이들 외에 페루, 칠레 등에도 최근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남미엔 제2의
'핑크 타이드'(온건 사회주의 성향 좌파물결)가 나타나고 있다.
29일 콜롬비아 대선, 10월 브라질 대선에서도 좌파 후보가 우세하다.
도식적으로 좌우로 나누긴 했지만 중남미 정상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다양하며, 많은 정상이 이념을 떠나 실용주의자다. 1990∼2000년대 첫 핑크 타이드 때와도 양상은 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남미에 좌파 정부가 늘어나면서 이들 국가끼리 더 친밀해지고,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 더 잦아졌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는 미국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 상황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춰 마두로 정권을 비난했던 미주 국가 협의체 '리마그룹'은 유명무실해졌다. 좌파로 정권이 교체된 회원국들이 하나둘 떠난 탓이다.
가뜩이나 호시탐탐 '뒷마당'을 노리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반장' 미국이 주최하는 이번 미주 반상회는 어떻게 될까.
미국은 일단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정상은 초청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좌파지만 페루와 칠레의 대통령은 일찌감치 참석 계획을 밝혔고,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관계가 소원한 브라질의 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불참을 시사했다가 미국의 양자 회담 제안에 마음을 바꿨다.
다른 정상들도 미국의 물밑 설득 속에 못 이기는 척 참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작 전부터 삐걱댄 이번 미주정상회의는 중남미가 속속 분홍빛으로 물들수록 미주 국가들 간의 역학관계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찾아오고, 미국의 '뒷마당 지키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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