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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톡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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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톡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사진기자의 우크라이나 현지 취재기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 이상화 시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피란민과 전쟁피해자의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봄이 비웃듯 생기 잃은 검은색 캐리어와 투박한 카메라 가방을 챙겨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로 향했다.
검문소에서 10km 떨어진 지점부터 늘어서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귀향 차량 행렬을 지나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맑았던 날씨는 우중충했다. 차량검문소 너머 보이는 우크라이나 측 하늘은 낮은 명도의 먹구름이 깔려있었다.
신속하게 통과된 메디카 검문소와 달리 우크라이나 르비우 셰게니 국경검문소의 입국 절차는 엄격했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가 발급한 취재 허가 프레스카드와 여권을 꼼꼼히 대조한 후에야 입국을 허용했다.

셰게니 검문소를 통과하자 폴란드로 향하는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보였다. 그들을 취재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몇 걸음 움직이자 군인이 "노 포토(No photo)"라고 외치며 다가왔다. 프레스카드를 보여줬지만 소용없었다. 막연함과 함께 5일간의 취재 일정이 시작됐다.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담으려 노력했다. 아래는 러시아군 폭격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샤샤와 라라



샤샤 씨와 딸 라라는 개인이 운영하는 르비우 피란민 센터에서 생활 중이다.
샤샤 씨가 전쟁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도네츠크에 거주했던 이들은 2014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시아 반군이 맞붙은 돈바스 전쟁 발발 후 루한스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라라의 나이는 생후 7개월이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루한스크에 머무를 수 없었던 이들은 르비우로 이주를 결심했다.
샤샤 씨가 "루한스크의 집이 그대로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울음을 터뜨리자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라라가 "엄마, 집에 가기 싫어요"라고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나와 마리아



샤샤 씨와 같은 센터에서 지내는 인나 씨와 손녀 마리아는 하르키우로부터 탈출에 성공했다.
하르키우 외곽에 있는 인나 씨의 집은 전선에서 불과 12㎞ 떨어져 있었다. 인나 씨가 마리아를 데리고 집을 비운 사이 전쟁이 터졌고 그 길로 방공호로 향해야 했다.

이들은 러시아군을 피해 방공호에서 무려 51일간 버텼다고 한다. 러시아군의 포격과 폭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포의 나날이었다.
하르키우에서 수백㎞ 떨어진 르비우로 피신했지만 두려움까지 가시지는 않아 보였다.

"지금 있는 피란민 센터 주변에 목공소가 있는데 톱질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녀가 공포에 질립니다. 마리아는 심리 치료를 받고 있어요"
마리아는 전쟁의 참상이 떠오르는 듯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지었고 인나 씨는 손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인터뷰 내내 마리아의 무릎과 손을 쓰다듬어줬다.

▲엘레나

엘레나 씨는 만삭의 몸으로 지난달 하르키우에서 르비우로 넘어왔다.
우크라이나 북동부에 있는 하르키우는 러시아 국경에서 약 20㎞ 정도 떨어진 도시로, 침공 초기부터 러시아의 공격이 집중된 지역이다.

그는 "임신한 상태로 피란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며 "안전한 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 르비우로 왔다"고 말했다.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격전지인 동부지역을 떠나 비교적 안전한 서부지역 르비우로 많은 피란민이 들어와 도시 내 출산율이 4배가량 증가했다.

▲율리아






율리아 씨는 러시아가 맹공격을 퍼붓고 있는 도네츠크에서 지난달 탈출에 성공했다.
임시 난민촌을 전전하던 그는 지난 6일 이동식 주택 단지에서 둥지를 틀었다.

르비우 외곽에 위치한 이동식 주택 단지는 폴란드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졌다. 지난 6일 문을 연 이곳에는 3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80채의 간이 주택이 설치됐다. 또 기간 제한 없이 장기간 머무는 게 가능하다.
율리아 씨는 "폭격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남편 그리고 두 아들과 그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사소한 대화를 나누던 평범한 일상을 되찾고 싶다"는 말을 남긴 뒤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고려인 크리스티나와 옥사나 그리고 리우보우



열다섯 살 소녀 크리스티나는 마리우폴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군인인 아빠는 함께 오지 못했다.
"아빠는 아조우스탈에 남아 계세요"

이번 전쟁에서 마리우폴은 최악의 반인권 범죄를,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우크라이나인의 필사적 저항을 상징한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병력이 버티는 아조우스탈을 두 달여 간 봉쇄하고 폭격을 퍼붓고 있다.

크리스티나의 아빠 올렉시 씨는 지난달 30일을 끝으로 연락이 끊겨 지금은 생사도 알 수 없게 됐다.

크리스티나는 엄마 옥사나와 극적으로 마리우폴 탈출에 성공한 뒤 도네츠크에 있는 할머니와 만나 르비우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도네츠크에서 동쪽인 러시아 본토 로스토프로 이동해 승합차를 빌렸다.

이들을 태운 차량은 북서쪽으로 약 2천400㎞ 달려 에스토니아에 도착했다. 다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을 육로로 관통해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그 후 기차를 타고 우크라이나로 입국, 최종 목적지인 르비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동 거리만 약 3천700㎞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르히이





세르히이 씨는 전쟁 발발 이후 하르키우에서 구호 물품을 조달하던 도중 러시아군 총격에 부상을 입었다.
지난 3월 10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호 물품을 운송하던 도중 차 뒤에서 총성이 들렸고 이내 그를 향한 총격 세례가 무자비하게 이어졌다.
세르히이 씨는 "순식간에 폐와 간에 총알이 박혔고,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정신이 희미해졌다"며 아직도 말하는 게 힘들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총 5발의 총알을 맞았고 바로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의료병이 그를 발견해 신속히 폐를 닫은 뒤 인근 병원으로 이송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로 얼룩졌다. 그날의 총성이 오롯이 전해지는 흔적들이었다.
세르히이 씨는 "나는 우크라이나인이다"며 "빨리 회복해서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조국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세르히이 씨와 작별 인사를 마친 뒤 병원을 빠져나와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아름다웠다. 첫날도 그랬다. 얄궂게 내리던 비는 르비우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그쳤다.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햇빛이 도시를 밝혔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나무는 푸르렀다. 광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곳에는 첨예한 대립도, 인간의 욕망도, 잔인한 죽음도 없었다. 아름다워서 슬펐다.

르비우를 떠나기 위해 다시 셰게니 검문소를 가는 길목에는 만개한 유채꽃과 체리꽃이 들판을 채우고 있었다. 목가적 풍경은 전쟁과 어울리지 않았다.

전쟁 전 대부분의 서방 정보기관과 언론은 러시아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우크라이나가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전 사흘 만에 키이우를 함락할 것이라는 러시아의 경고를 의심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키이우를 포함한 북부 전선에서 러시아를 몰아냈으며, 동부와 남부 전선에서도 80일 가까이 지난 지금 러시아에 팽팽히 맞서고 있다.

"내가 오직 원하는 건 평화다. 상식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 인나

hwayoung7@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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