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서부거점 르비우에서] "기자증이 미사일 막을 것 같나"
민간인 가리지 않는 러시아 무차별 폭격 현장 처참
2차 세계대전 '전승절' 전날 긴장 최고조…공습 사이렌에 '혼비백산'
(르비우[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젠장, 2∼3분 내로 끝내세요. 빨리 여길 피해야 합니다."
공습을 경고하는 고음의 사이렌이 울려 퍼지자 길을 안내해 주던 예브게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서부 거점 르비우에 들어온 이후 네 번째 듣는 공습 사이렌이었다. 3월 우크라이나 남부 체르니우치 취재 때는 하루에 여섯 번 사이렌 소리를 들은 적도 있어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공습 사이렌은 며칠 전 러시아 미사일이 떨어진 발전소를 직접 취재하려고 무너진 담을 넘는 순간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취재 도중 이곳으로 미사일이 날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굳어졌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다.
사색이 된 예브게니가 얼른 취재를 끝내라고 재촉했다.
화급한 재촉에 마음이 바빠져 취재를 서둘러 마치고 폭격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너무 태평하다"는 예브게니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프레스 카드(기자증)로 미사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나요? 러시아가 대규모 공격을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반드시 알아야 해요"
그도 그럴 것이 이날은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전승절 하루 전이었다.
서방 정부는 러시아가 9일 '승전'을 선언하기 위해 8일부터 우크라이나 전역을 무차별로 공습할 것이라는 경고를 잇달아 내놨다.
예브게니는 자신의 집이 발전소에서 불과 2㎞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이달 3일 새벽 4시께 사이렌이 울려 잠에서 깼고 15분쯤 뒤 미사일이 발전소를 직격했다고 했다. 르비우 시내는 순식간에 정전이 됐다.
"'휙'하는 소리를 내며 미사일이 머리 위로 날아갔습니다. 곧바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어요. 우리 집에서도 발전소가 불타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잠깐 둘러봤지만 미사일 폭격을 맞아 새까만 재만 남아버린 발전소의 모습은 처참했다.
러시아의 주요 표적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큰 르비우에는 여느 때와 다른 긴장이 감돌았다.
이 도시가 우크라이나 서부의 최대 도시이자 서방의 무기와 탄약 등 군수물자가 우크라이나로 반입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르비우 시청 광장에서 만난 아나스타샤 씨는 "러시아가 곧 대규모 공격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집이 기차역 근처라 더 무섭다"고 말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후방 보급기지인 르비우에서 전선으로 군수품이 운송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철도와 기차역, 발전소 등 기간시설을 집중적으로 타격하고 있다.
지난 3일 르비우 서부의 민간 차량 정비소도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는데, 현지 주민들은 100m가량 떨어진 군용 기차역을 노린 미사일이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러시아는 군 시설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지에서 이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을 직접 겪은 탓이다. 외국에서 온 취재진이라고 해서 미사일이 피해갈 리 만무하다.
러시아의 공격 우려가 커지면서 우크라이나 군의 경계 수준도 높아진 모습이었다.
키이우 시내 곳곳에 모래주머니와 콘크리트 덩어리로 만든 간이 초소와 전차나 장갑차의 진입을 막기 위한 장애물이 설치돼 있었다.
시내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은 외국 기자의 취재와 사진 촬영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차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경고를 들을 수 있었다.
전쟁이 70일 넘게 이어지면서 르비우에도 주민의 일상을 파괴한 전쟁의 여파는 분명했다.
하루 주유량을 차 한 대당 15L로 제한하면서 시내 주유소에는 연료를 채우려는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림짐작으로도 족히 50대는 넘어 보였다.
우크라이나 최대 보급 기지여서 그나마 물자가 부족하지 않다는 르비우의 상황이 이렇다면 다른 지역의 상황이 어떨지는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공습 사이렌과 불편해진 생활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항전 의지까지 꺾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르비우 시청 광장 한편에는 전쟁으로 사망한 희생자의 사진을 꽃으로 감싼 추모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아르투르 씨는 "징집령이 내려져서 모든 사람이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다"며 "우리 모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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