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침공] 이르핀의 비극…포탄에 가족 몰살된 남성의 절규
트위터에 올라온 낯익은 캐리어 보고 참사 직감
코로나 걸린 모친 돌보느라 아내·남매만 피란하다 참변
(서울=연합뉴스) 전명훈 기자 = 지난 6일(현지시간) 새벽 아픈 노모를 봉양하러 갔다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발이 묶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세르히이 페레비니스(43)는 스마트폰으로 아내의 위치를 거듭 확인했다.
수도 키이우(키예프) 근처 소도시 이르핀에 머물던 아내 테티아나가 18살 아들과 9살 딸을 데리고 키이우로 대피하겠다고 알려온 뒤 연락이 닿지 않아서다. 현지 통신 사정이 좋지 않은 듯했다.
오전 10시가 돼서야 아내의 위치 신호가 잡혔다. 이르핀의 병원이었다. 아내도, 아이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30분째 전화통을 붙잡고 씨름하는데 트위터에 불길한 소식이 올라왔다. 이르핀에서 키이우로 대피하던 일가족이 러시아군 포격에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곧 이어 올라온 사진에 페레비니스는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속 나뒹구는 여행 캐리어가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군의 포격에 가족을 모두 잃은 우크라이나 남성이 9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를 하고 비탄에 빠진 심경을 밝혔다.
"(피격) 바로 전날 밤 아내에게 '옆에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어요. 아내는 걱정하지 말라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답했는데……"
앞서 NYT는 이 피격으로 사망한 일가족의 충격적인 사진을 지난 7일 신문 1면에 보도했다. 당시 사진에는 참혹한 시신 곁에 푸른색과 회색 여행용 캐리어가 널브러진 모습이 담겼다.
페레비니스는 가족의 시신이 찍힌 사진에 대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세계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NYT에 따르면 세르히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린 모친을 돌보려고 이르핀에서 약 600㎞ 떨어진 도네츠크 지역으로 향했다가 갑자기 전쟁이 터지면서 이동이 통제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의 공격에 살해된 아내 테티아나는 미국과 영국 등에 지사를 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폴란드에 숙소까지 마련해 놓고 직원에게 대피를 권고했으나, 테티아나는 근처에 사는 친정부모를 어떻게 모시고 갈지 걱정하다가 결정이 늦어진 상황이었다. 그의 모친은 치매를 앓고 있다고 한다.
결국 피난을 결심한 테티아나는 도로가 끊겨 차를 버린 채 친정부모, 자녀들과 함께 육로로 키이우로 향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포격에 몸을 숨길 곳이 없는 수백m를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고,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으나 약 11m 옆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남편은 가족을 모두 잃은 후에야 키이우로 간신히 돌아왔다. 도네츠크에서 러시아 본토로, 이어 폴란드 북쪽 칼리닌그라드로 비행기를 탄 뒤 폴란드 육로를 지나는 수천㎞의 여정을 거쳤다.
그는 이날 페이스북에 키이우 도착 사실을 공개하고 "영안실이 넘쳐나 장례식이 지연되고 있다"며 "사랑하는 아내가 검은 가방에 담겨 바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러시아 당국자에게 "당신들이 '특수 작전'이라고 부르는 그것 때문에 가족이 몰살당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할 테면 하라. 더 잃을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NYT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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