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할 길 녹색경영] ① 글로벌 연기금까지 압박…기업들 ESG 부담 가중
유럽 최대 연기금 국내 주요 기업에 탄소감축 요구 서한…투자 철회 우려도
세계 각국 ESG 강화속 한국 수준 뒤처져…"징벌 아닌 새로운 기회로 삼아야"
(서울=연합뉴스) 산업팀 = 최근 글로벌 기관투자가가 국내 주요 기업에 탄소 배출 감축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서면서 기업들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기후변화 위기 속에서 ESG가 산업계의 대세가 되면서 기업들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지는 오래됐지만, 제조업 위주인 국내 산업계의 ESG 경영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많다.
투자자 등 이해 관계자의 ESG 압박까지 본격화되면서 국내 기업들은 대책 마련에 더욱 분주한 모습이다.
◇ ESG 용어 2005년 등장…세계 각국 정부·기업, 기후변화 대응 속도 높여
21일 업계에 따르면 ESG라는 용어는 2005년 국제금융공사(IFC)가 발간한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친환경(Environment), 사회적 책임(Social), 지배구조 개선(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다. 기업의 재무적 성과 중심이던 전통적 투자 방식과 달리 장기적인 기업 가치·지속 가능성과 연관된 비재무적 요소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특히 2005년 유엔환경계획(UNEP)이 ESG를 공식 용어로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산업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기후변화 위기와 맞물려 세계 각국이 환경 관련 목표치를 상향하고 규제를 강화하면서 ESG 중에서도 환경(E)이 핵심 항목이 됐다.
이어 다국적 비영리기구 '더 클라이밋 그룹'(기후그룹)과 환경경영 인증기관인 '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CDP)가 2014년 RE100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의 참여가 본격화했다. RE100은 2050년까지 기업 사용 전력량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캠페인이다.
2015년 말에는 세계 각국이 유엔 기후변화 회의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을 다짐하는 '파리 협정'을 채택했고, 2019년에는 유럽연합(EU)이 2050년까지 '넷 제로'(Net Zero·배출하는 탄소량과 감축하는 탄소량을 더했을 때 0이 되는 것)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선언했다.
우리 정부도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고, 2050년에는 넷 제로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지난해 확정했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SK그룹 8개사가 2020년 11월 가장 먼저 RE100에 가입한 이래로 다른 기업들의 참여도 확대되고 있다.
최근 CDP 위원회가 공개한 'RE100 2021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RE100에 가입한 글로벌 기업 345곳 중 국내 기업들의 RE100 전환 실적은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애플 등 다수 해외 기업이 2020년 기준 RE100 100%를 달성했으나, 국내 기업 중 실적이 가장 앞선 LG에너지솔루션의 전환 실적은 33% 수준이었다. 그 외 다른 기업들은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 네덜란드 APG, 삼성·LG·SK 등에 '경고장'…글로벌 기관투자가 압박 커져
이런 가운데 유럽 최대 연기금 운용사인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APG)이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대표 대기업 10곳에 탄소 배출 감축을 요구하고 나섰다.
글로벌 연기금이 개별 기업에 탄소 배출 감축을 요구하는 주주서한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APG가 서한을 보낸 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제철, SK, SK하이닉스, LG화학, LG디스플레이, 롯데케미칼, 포스코케미칼, LG유플러스, SK텔레콤 등으로 국가 경제를 이끄는 반도체·디스플레이·화학·철강 등의 업종이 모두 포함됐다.
APG는 한국 기업들이 전 세계 산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경제 규모 등에 비해 기후변화 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탄소배출 감축에 있어 실질적 성과를 내지 못하면 투자가들이 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한국 기업들도 탄소 배출량을 실제로 감축하고 이행 계획을 주주와 소통해야 한다며 이번 서한을 시작으로 주주로서의 책임 투자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기관 투자가들의 ESG 경영 압박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APG는 지난해에는 한국전력이 석탄화력발전 사업에 참여하는 등 기후변화 대응에 노력하지 않는다며 그간의 투자를 철회하고 지분을 모두 매각한 바 있다.
앞서 2020년 8월 영국 최대 기업연금 운용사인 리걸앤드제네럴 그룹, 노르웨이 연금회사 KLP, 핀란드 노르디아은행 등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한국전력이 시행하는 베트남 붕앙2 석탄화력발전 사업이 "기후 관련 리스크를 일으킬 수 있다"며 사업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삼성물산은 오랫동안 진행해 온 해당 사업까지만 참여하고 신규 석탄 사업·투자는 전면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그해 10월 발표했다. 삼성물산은 친환경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대해나간다는 방침이다.
현대건설도 지난해 1월 기존 사업을 제외한 신규 석탄발전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 2015년에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 노르웨이 연기금이 인도네시아 팜 농장을 '비윤리적 투자'로 규정하고 포스코인터내셔널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했고, 2018년에는 네덜란드 공적연금도 포스코인터내셔널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전례가 있다.
이에 따라 포스코인터내셔널은 2020년 3월 팜 사업을 산림 파괴, 이탄습지(석탄 이전 단계의 유기물 퇴적층) 파괴, 주민 착취 없이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 대기업들 대책 마련 분주…"새로운 사업·투자 기회로 삼아야"
국내 기업들은 글로벌 기관 투자가들의 ESG 요구가 향후 후속 조치, 이른바 '페널티'로까지 이어질지에 촉각을 세우며 대책 수립 및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대형 기관투자가들이 투자 대상에서 제외하고 지분을 철회하면 해당 기업의 주가 하락은 물론이고 평판 훼손으로 이어지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APG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글로벌 기관 투자가들의 추가 요구나 조치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일례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2020년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투자 결정 기준으로 삼겠다"고 선언하면서 석탄 관련 매출이 25%가 넘는 기업의 주식을 처분했다. 자동차 기업 볼보에 대해서는 ESG 공시 미비를 이유로 이사회 의장 연임에 반대하기도 했다.
APG로부터 서한을 받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업들은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 기울이고 있는 다양한 노력을 성실하게 답변하겠다"고 밝혔다.
3월 정기 주주총회를 기점으로 다수 기업이 ESG와 관련해 강화된 기준을 제시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지난달 말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산업계에서 인명 사고도 빈발하고 있어 안전에 대한 요구가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ESG가 기업의 생존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매김한 만큼 국내 기업들이 해외 성공 사례를 참고해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ESG 강화를 통해 기존 사업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규 사업과 투자 발굴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 정유기업 엑슨모빌은 행동주의 투자사 엔진넘버원으로부터 청정에너지 투자를 확대하라는 요구를 받고 이를 신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2025년까지 30억달러(약 3조5천856억원)를 저탄소 기술 상용화를 위해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국내 기업의 ESG 강화를 위해서는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철민 대한상공회의소 ESG 경영실장은 "아직 상당수 국내 기업은 ESG 경영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ESG 관련 신기술 개발, 중견·중소기업의 ESG 강화 등을 위해서는 차별화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shin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