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거친 압박 속 미국과 협력 강화 택한 대만인들
대미 '돼지고기 양보' 지지 극적 반전…미·대만 밀월 걸림돌 제거
'선거여왕' 차이잉원 역전극…'중국 의존 말고 세계 나가자' 호소 먹혀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대만인들이 18일 국민투표를 통해 가축 성장 촉진제인 락토파민이 함유된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을 강행한 정부 결정을 사실상 추인했다.
대중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일각의 강한 우려에도 더 많은 대만인이 락토파민 함유 돼지고기 수입을 허가한 정부 결정을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린 것은 중국의 대만 압박이 날로 거칠어지는 가운데 안보를 크게 의존하는 미국과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만이 18일 4개 안건을 두고 국민투표를 치른 가운데 최대 관심사는 락토파민 함유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 금지 안건의 통과 여부였다.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은 17일 타이베이(臺北) 유세에서 '가장 도전적 의제'라고 토로할 정도로 대만 정부에 가장 큰 부담이 된 안건이다.
락토파민 돼지고기 수입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대중의 건강 문제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만과 미국, 대만과 중국 간의 복잡한 삼각관계가 반영된 문제다.
미중 신냉전이 본격화하고 나서 미국은 인도·태평양전략의 전초 기지로서의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대만과 전방위적인 협력을 강화하고 나섰다.
2016년 집권 후 중국과 거리를 두고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매진해온 차이잉원(蔡英文) 정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트럼프 행정부 후반기부터 미국과 대만의 관계는 전례 없는 밀월을 구가하면서 군사·외교·경제·기술·산업 등 여러 방면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추세다.
이런 배경 속에서 차이잉원 정부는 과도한 중국 경제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작년 12월 큰 정치적 '결단'을 내린다.
바로 국내 저항이 만만치 않은 락토파민 함유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을 전격 허용한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대만이 희망해온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추진하기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조처였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대만의 락토파민 함유 돼지고기 수입 금지가 자유무역협정 논의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지목해오면서 전향적 조처를 요구했다.
차이잉원 정부의 '양보' 이후 미국도 움직였다. 미국은 중국의 거친 반발에도 지난 6월 대만과 FTA의 전 단계로 평가되는 무역투자기본협정(TIFA) 협상을 재개했다.
대만 정부는 미국과의 FTA 체결, 일본·호주 등 미국의 동맹국 다수가 포함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통해 '고립'에서 탈출해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들어가 수출 중심의 경제를 더욱 발전시켜나간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FTA와 CPTPP는 대만이 고립을 벗어나는 중요한 포석"이라는 차이 총통의 국민투표 전날 밤 유세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입법회(국회) 회의장에서 돼지 내장을 뿌릴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했던 국민당은 '국민 건강 위협'이라는 프레임을 앞세워 정치적 공세에 나섰다.
여대야소 국면에서 행정명령 발령을 막지 못했지만 당력을 총동원해 국민투표 안건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날로 커지는 반중 정서 속에서 작년 1월 동시에 치러진 대선·총선에서 대패하는 등 입지가 급속히 약화되 위기감을 느낀 국민당은 '락토파민 돼지고기' 문제를 정치 쟁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엿봤다.
실제로 '국민 건강 위협'이라는 국민당 측의 감성적 구호가 더욱 설득력 있게 작용하면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국민당이 제안한 락토파민 함유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 금지 지지 여론이 반대 여론을 줄곧 압도했다.
따라서 이날 국민투표에서 비록 약 20만표의 비교적 근소한 차이로 안건이 부결됐지만 기존의 여론 흐름을 고려한다면 정부와 여당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는 상황이다.
대만 정부·여당의 승리에는 유권자들을 상대로 왜 미국에 '대승적 양보'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를 끈질기게 설득한 이성적 접근 위주의 투표 캠페인 전략이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차이 총통은 전날 마지막 유세 연설에서도 락토파민 함유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이 대만이 고립을 탈출해 세계로 나가기 위한 과정에서 필수적인 선택이라는 논지를 펴면서 이런 대만의 선택이 미국과의 TFIA 협상으로 나아가는 실질적 성과로 이어졌음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이들이 대만이 세계와 함께 서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며 "만일 우리가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대만 경제는 중국과 함께 계속 묶여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만 정부·여당은 락토파민 함유 돼지고기가 중국과 유럽연합(EU)에서 금지되고 있지만 미국과 한국 등 다수 국가에서 함유량이 과학적으로 통제되는 가운데 허용되고 있고, 일반 대중이 락토파민 함유 돼지고기를 사 먹지 않을 선택권을 갖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대만에서는 학교 급식에서 대만산 돼지고기만 사용된다.
미국과 밀월 관계 강화를 가로막을 위협 요인이 제거됨에 따라 미국과의 관계를 전방위적으로 발전시켜나가려는 차이 총통의 정책 방향에 한층 힘이 실릴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투표에서 차이잉원 정권이 패배해 조기 레임덕이 오고 친중 성격이 강한 국민당의 재집권 희망이 높아지는 시나리오를 기대한 중국으로서는 실망스러운 결과일 수도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만약 (수입 금지) '찬성'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차이잉원 총통은 딜레마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베이징이 민주적인 통치하에 있는 섬(대만)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지지를 유지하는 것은 특히 중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차이 총통은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답게 레임덕 위기에서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 눈길을 끈다.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통령이 급진적인 대만 독립 추진과 부패 스캔들로 민심을 잃고 2008년 국민당에 정권을 내주고 나서 차이 총통은 만신창이가 된 민진당 주석직을 맡아 당의 재건에 앞장서면서 핵심 지도자로 부상했고 이후 7번의 크고 작은 선거에서 내리 승리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다.
차이 총통은 집권 1기인 2018년 11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당 주석직을 내려놓는 등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2020년 1월 대선에서 역다 최대 득표로 당선됐고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민진당의 압승도 견인하는 등 위기에 강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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