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 "조선인 태평양전쟁 전범 외면은 일본 국민 책임"
마지막 생존자 별세에 "이 나라의 정의는 무엇인가" 반성의 목소리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일본 정부가 조선인 태평양전쟁 전범을 끝내 외면한 것은 일본 국민의 책임이라는 반성이 일본 언론에서 나왔다.
아사히신문은 7일 자 '일본의 정의를 묻고 또 묻는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조선인 태평양전쟁 B·C급 전범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학래 옹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살아 있는 동안에 구제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고인은 1942년 17세의 나이로 징집돼 일본군 군속(軍屬·군무원)으로 동남아시아의 철도 건설 현장에서 노역하는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일을 했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포로 취급을 규정한 제네바협약의 존재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건설 현장에는 의료물자가 턱없이 부족해 포로 중 환자가 발생해도 대응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고인은 생전에 밝힌 바 있다.
당시 많은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 고인은 포로 학대 혐의로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감형돼 1956년에 석방됐다.
고인은 출소 후 고향인 전라남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조선인 전범은 친일파로 낙인찍혀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소식에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남았다.
아사히는 "전범이 된 사람들(조선인)을 괴롭힌 것은 고국의 차가운 시선이었다"며 "귀국해도 대일 협력자라며 주위에서 받아주지 않아 (귀국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일본에 남은 조선인 전범은 일본 정부로부터도 외면을 받았다.
일본인 전범과 유족은 일본 정부로부터 연금과 위자료 등의 보상을 받았지만,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 국적을 상실한 조선인 전범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고인은 일본에 남은 다른 조선인 전범 생존자들과 함께 동진회라는 조직을 결성해 60년 이상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의 끈질긴 요구를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아사히는 "이 나라의 정의와 양식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면서 "정치의, 그리고 그 정치의 부작위를 못 본 체한 국민의 책임을 묻게 된다"고 반성의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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