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부른 이탈리아 연정 위기…총리 교체·조기총선도 거론(종합)
EU 회복기금 사용 놓고 내홍 심화…렌치 전 총리 "연정 탈퇴" 위협
콘테 총리와 막다른 대치…개각부터 총선까지 위기 수습 시나리오 분출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속에 이탈리아 연립정부의 내홍이 막다른 상황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이탈리아 연정 갈등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며 현지 정가에서도 사태 전개를 예의주시하는 모양새다.
정가 안팎에서는 개각부터 조기 총선까지 다양한 시나리오가 흘러나온다.
이번 위기는 연정 구성 정당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생동하는 이탈리아'(Italia Viva·IV)의 마테오 렌치 전 총리가 주도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코로나19의 경제 충격을 완화하고자 도입한 회복기금 사용 로드맵을 놓고 주세페 콘테 총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시작됐다.
회복기금은 총 7천500억 유로(약 1천5조원) 규모인데 이 가운데 이탈리아에 대한 지원액이 2천90억 유로(약 280조원)로 가장 많다.
각국은 기금의 사용 계획을 EU 집행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탈리아 정부 역시 작년 말 개괄적인 기금 사용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렌치 전 총리는 연정이 국가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즉흥적이고 근시안적으로 계획을 수립했다며 비판해왔다.
여기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민낯을 드러낸 공공 보건·의료 분야에 대한 투자 규모가 지나치게 작다는 지적도 포함됐다.
그는 콘테 총리가 이처럼 중요한 일을 의회와 협의하지 않고 소수의 각료에게 맡겨 자의적으로 처리했다는 점에도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이를 시정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연정을 떠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렌치 전 총리는 5일(현지시간)에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능과 태만의 공범이 되기보다 차라리 연정을 그만두겠다고 위협했다.
콘테 총리는 기금 사용 계획을 수정하기로 하는 등 렌치 전 총리를 달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렌치 전 총리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태세다.
일각에서는 렌치 전 총리가 총리 교체까지 염두에 둔 듯하다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일간 일 조르날레도 "렌치 전 총리가 이번에는 끝까지 가려고 하는 것 같다"고 짚었다.
함께 연정을 구성하는 반체제정당 오성운동은 '총리를 건드리지 말라'며 렌치 전 총리에 경고장을 날렸고, 또 다른 연정 파트너인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당은 물밑 중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별 성과가 없는 상태다.
2009년 민주당 소속으로 피렌체 시장에 당선되며 정계에 발을 들인 렌치 전 총리는 5년 뒤인 2014년 역대 최연소인 39세로 총리직에 오르며 이탈리아 정치권에 '젊은 바람'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정치 스타일을 빗대어 '21세기 마키아벨리'라며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그는 2019년 9월 민주당을 탈당한 뒤 자기 세력을 규합해 중도를 표방한 IV를 창당했다. 원래 오성운동-민주당 체제였던 연정이 IV를 포함한 3개 정당 구조로 재편되며 연정 내의 정책·노선 갈등도 그만큼 잦아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내각에서는 농업장관과 양성평등장관 등 2명이 IV 소속이다.
이번 위기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과 맞물려 현지 정가와 언론에서는 벌써 다양한 향후 정국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가장 무난한 시나리오는 렌치 전 총리가 IV의 당론이 반영된 기금 사용 계획 수정안을 받아들이고 분위기 쇄신 차원의 개각으로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다.
다만 렌치 전 총리가 최근까지도 개각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을 고수해 실현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콘테 총리가 렌치 전 총리에게 외무·내무·법무장관 등과 같은 핵심 포스트 입각을 제안했으나 렌치 전 총리가 거부했다는 설도 있다.
렌치 전 총리가 끝내 연정을 떠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콘테 총리는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을 만나 이를 보고하고 사임 의사를 밝힐 것으로 예상된다.
마타렐라 대통령이 연정 구성 권한을 다시 콘테 총리에게 준다면 콘테 3기 내각으로 가는 수순을 밟게 되고, 렌치 전 총리를 비롯한 제삼자가 구성권을 쥘 경우 새로운 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예단하기 어렵지만, 현재로서는 높은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콘테 총리에게 기회가 다시 주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진다.
지금과 같은 3당 연정 아래 총리만 교체되는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렌치 전 총리가 콘테 총리에 큰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새 총리 후보로는 민주당 대표인 니콜라 진가레티 라치오주 주지사와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등이 오르내린다.
특히 경제 전문가인 드라기 전 총재는 코로나19가 불러온 이탈리아 경제 위기를 타개할 적임자로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모든 시도가 물거품이 되면 결국 현 의회 해산과 함께 조기 총선으로 갈 수밖에 없다. 현지 정가에서 최후의 수단이자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임기가 2023년까지인 현 연정 구성 정당 가운데 그 어느 정당도 이를 반기지 않는다.
현재의 여론 구도를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 총선이 치러지면 마테오 살비니가 이끄는 극우 정당 '동맹'이 원내 1당이 되고 정권이 우파연합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조기 총선으로 가려면 모든 절차가 8월 이전에 마무리돼야 한다. 마타렐라 대통령 임기가 내년 2월 만료되는데, 규정상 임기 마지막 6개월간은 의회 해산을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대규모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무시하기 어려운 걸림돌이다.
6일 기준으로 이탈리아의 코로나19 하루 신규 확진자 수는 2만331명, 사망자 수는 548명이다. 누적으로는 각각 220만1천945명, 7만6천877명으로 집계됐다.
luch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