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주와 라이트 핸드의 명인…'기타의 혁명아' 반 헤일런
1980년대 중반 게리무어, 마이클 쉥커와 삼각 구도 형성
국내 록커들 사이에서 '음악적 지주'…"한국 음악 발전에 '간접' 영향"
(서울=연합뉴스) 김범수 기자 = 65세를 일기로 타계한 에드워드 반 헤일런은 대중음악 기타 연주 기법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타의 혁명아'로 통한다.
그는 1978년 첫 앨범에 수록된 연주곡 '이럽션'(Eruption)으로 전세계 음악 평론가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작품에서 그는 왼손가락으로 기타 지판을 누르는 동시에 주로 오른손가락 검지를 이용해 연음을 내는 이른바 '라이트 핸드' 주법을 선보였다. 이전에 일부 재즈 연주자들이 비슷한 주법을 선보였지만 현란함과 기교 면에서 진일보한 완성도를 드러내면서 단숨에 기타 영웅으로 등극했다.
음악사적 측면에서 보면 지미 헨드릭스가 사이키델릭한 하드록 기타 연주의 스케일을 확립한 선구자였다면, 반 헤일런은 여기에다 라이트 핸드를 비롯한 고난도의 현란한 기타 솔로를 입힌 최초의 뮤지션으로 평가된다.
반 헤일런 연주의 특성은 정확하고 빠른 피킹, 탁월한 리듬감과 톤(Tone) 메이킹을 비롯해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플레이로 집약된다.
때로는 명랑하고 낙천적인 분위기를 담은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딴 '반 헤일런'을 미국을 대표하는 로큰롤 밴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당대의 기타리스트들이 탐낸 명 보컬리스트들과 함께 작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8년 첫 앨범 발표 이후 1984년까지 불세출의 보컬리스트 데이비드 리 로스와 함께 '점프', '파나마' 등 빌보드 차트 상위에 오른 히트곡들을 양산했다. 이후에는 시원하고 힘찬 하이톤을 내세운 새미 해이거와 손을 잡고 '서머 나이트', '드림스' 등을 발표하는 등 계속해서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지난 2011년 작고한 아일랜드 출신의 게리 무어 및 현재도 활동중인 독일의 마이클 쉥커와 삼각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강력한 피킹과 비브라토를 내세운 게리 무어와 서정적이면서도 때로는 격정적인 난이도 높은 연주를 들려준 마이클 쉥커가 유럽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였다면, 반 헤일런은 미국 기타의 자존심으로 꼽혔다.
국내 음악계에도 반 헤일런이 간접적으로나마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고 평론가들은 전한다.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한국 대중음악의 고급화를 지향한 밴드 및 세션 연주자들이 대개 초보시절에 '음악적 지주'인 그의 작품을 카피하면서 역량을 키웠고, 향후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른바 3대 기타리스트라 불리는 김도균, 신대철, 김태원을 비롯해 록 음악계에 몸담았던 다수의 연주자들은 기타를 처음 잡은 무렵부터 반 헤일런의 연주를 흉내내면서 록커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1980년대 중반에 발매된 국내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인 백두산과 시나위 1집도 밴드의 리더인 김도균과 신대철이 어린시절부터 그의 주법을 익히면서 역량있는 기타리스트로 성장한 결과 나올 수 있었던 작품들이다.
이후 댄스 음악이 시대를 풍미하면서 정통 록 음악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많은 록 기타리스들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솔로가수 앨범에 작곡가 및 세션으로 참여해 수준 높은 대중 음악을 선보이는 동시에 퓨전, 재즈 등 한국 음악의 다양화를 이끌었다.
록 음악평론가 이동원씨는 "반 헤일런은 시대를 앞서간 기타리스트였다"며 "그의 영향으로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수많은 훌륭한 뮤지션들이 배출됐고, 대중음악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bum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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