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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재정준칙에 "실효성 낮은 면피용"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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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재정준칙에 "실효성 낮은 면피용" 비판
전문가들 "주요 수치 시행령에 규정하면 정부 '자율 규제'…법제화 필요"
독일은 헌법, 프랑스는 법률에 규정…기준 수치도 한국보다 엄격


(서울=연합뉴스) 차지연 이보배 곽민서 기자 = 정부가 5일 발표한 한국형 재정준칙에는 국가채무 수준과 고령화 속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등 현재 국내 여건을 고려해 상당히 '느슨한' 수준의 규정이 담겼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60% 이내와 통합재정수지 비율 -3% 이내로 설정된 기준이 약할 뿐 아니라 대규모 재해나 경제 위기 때는 적용 면제나 기준 완화도 가능하도록 했다. 또 시행도 현 정부 임기 이후인 2025년으로 미뤘다.
전문가들은 이런 재정준칙은 실효성이 부족한 '면피용'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수준의 준칙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현 재정수준·중장기 전망·고령화 등 고려해 준칙 설정
정부는 현재 국가채무 수준과 중장기 전망, 고령화 속도, 해외 사례 등을 고려해 국가채무비율 기준을 60%, 통합재정수지 비율 기준을 -3%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실제 정부의 재정 상태를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가 아닌 통합재정수지로 재정준칙을 만든 것은 국제기준에 맞춰 국민연금·고용보험·산재보험 등 사회보장성기금까지 포함해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정부는 또 국가채무비율과 통합재정수지 비율 기준을 연계해 재정준칙을 충족했는지를 판단하도록 설계했다. 하나의 지표가 기준을 초과했다고 재정 준칙을 충족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두 지표를 합쳐서 판단하는 방식이다.
올해 4차 추가경정예산(추경) 기준으로 국가채무비율은 43.9%, 통합재정수지 비율은 -4.4%다. 이번 재정준칙에 적용하면 국가채무비율은 기준을 충족하지만 통합재정수지 비율은 기준을 상당히 초과해 전체적으로는 준칙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 위기에 따른 특수한 상황이어서 준칙을 초과했을 뿐, 정부가 제시한 기준이 아주 강도 높은 수준인 것은 아니다.
올해를 제외하고는 국가채무비율이 60%를 넘어선 적도, 통합재정수지 비율이 -3%보다 내려간 적도 없다.
기준 자체가 관대한 데다 적용 면제, 기준 완화 조항까지 추가돼 유연성을 훨씬 높아졌다. 시행 시기도 2025년부터라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는 적용되지 않고, 5년마다 한도를 수정할 수 있는 길도 열어뒀다.

◇ "원칙 자체도 느슨한데 예외까지 둬…확장재정 면책용 아닌가"
전문가들은 이런 재정준칙이 지나치게 느슨하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했다.
박형수 연세대 객원교수는 "정부는 2024년 국가채무비율을 58.6%로 전망하고 있는데 60% 근방까지 간 이후부터 재정준칙을 적용하겠다는 뜻"이라며 "국가채무비율이 60%까지 늘어나는 것은 허용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2016년 정부가 국가채무비율 40% 기준을 적용한 적도 있는데 60%라는 숫자가 목표로서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목표치가 너무 높게 설정돼있을 뿐 아니라, 국가채무비율과 통합재정수지 비율 중 하나만 달성해도 준칙을 준수한 것으로 보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고령화를 고려하면 60%는 구속력과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의미 있는 숫자"라면서도 "5년 단위로 목표를 잡는 방식을 취하면 채무 준칙 상한이 계속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염명배 충남대 교수는 "지금껏 관리재정수지를 주로 봤는데 재정준칙으로 통합재정수지를 택한 것은 '물타기'이며, 과거 수치와 정확히 비교하기가 어렵다"며 "관리재정수지 적자 폭이 훨씬 크기 때문에 통합재정수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적자 정도가 작게 보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염 교수는 "엄격하고 강한 준칙을 만들고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유예하도록 해야 했는데 원칙 자체가 느슨하면서 예외까지 둔 것은 문제"라며 "이런 방식의 재정준칙은 '우리도 준칙이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만 보여주는 것으로, 정부의 확장재정에 면책을 해주려는 면피용 규정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또 정부가 준칙의 수량적 한도를 시행령에 위임하고 국가재정법에는 준칙 도입 근거만 마련한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보였다.
김원식 건국대 교수는 "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행령에 한도를 규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조치"라며 "정부가 만들고 정부가 지키는 형태의 '자율 규제' 준칙은 결국 형식적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확실한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우철 교수도 "국가채무비율 등 숫자를 시행령에 규정하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약한 준칙, 매우 구속력이 떨어지는 낮은 수준의 준칙이 될 수밖에 없다"며 "준칙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국가재정법에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 독일은 헌법에 규정…다른 나라도 한국보다 기준 엄격
재정준칙은 전 세계 92개국이 운용 중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터키 등 2개국뿐이다.
해외 사례와 비교하면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준칙은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느슨한' 수준이라는 것이 더욱 뚜렷해진다.
독일은 재정 운용 목표를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구조적 재정적자를 GDP 대비 0.35% 이내로 유지함으로써 부채 신규 발행을 억제하는 내용이다.
프랑스도 재정준칙을 법률로 두고 있는데 구조적 재정적자를 GDP의 0.5% 이내로 유지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스웨덴이 지난해 도입한 재정준칙은 총 정부 부채를 GDP의 35%, 재정수지 흑자는 GDP의 0.33% 이내로 유지하게 하는 방식이다.
영국도 2019년 2020∼2021년도에 GDP 대비 공공부문 채무 비율을 축소하고 경기조정 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2% 미만으로 유지하는 내용의 준칙을 설정했다.
최근 코로나19에 대응해 EU와 미국에서는 재정준칙 적용 면제 혹은 유예 방침을 정했고 호주는 채무 한도를 상향 조정했다.
이런 예외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재정준칙은 절대적인 수준도, 방식도 해외보다 느슨해 실효성이 부족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charg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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